‘문재인 전 대통령은 북한이라는 친구에게만 집착하는 학생 같다.’
지난달 미국 뉴욕타임스의 윤석열 대통령 인터뷰를 읽고 이렇게 요약되는 기사 제목을 뽑으려다 잠시 망설였다. 기사 원문에 등장한 ‘obsessed with’ 때문이다. 문맥상 ‘사로잡힌’보다는 ‘집착하는’이 와닿았지만 전직 대통령에게 실례가 될 법했다. 현직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더더욱. 남북 관계에 공들였던 전임자를 대외적으로 공개 폄하하는 것 아닌가.
대통령실의 항의 전화도 부담이었다. 가령 “윤 대통령의 진의는 그게 아니었으니 ‘집착’이라는 표현은 빼달라”는 식으로. 기자가 된 이후 겪은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 사람들이 그랬다. 대통령이 논란의 소지가 있는 행보를 하면 언론에 “오해가 있었다”며 확산을 막으려 진땀을 뺐다. 국가 원수의 대외 메시지가 주는 무게 때문일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민을 해결해준 건 대통령실이었다. 언론 공지로 윤 대통령의 실제 발언을 소개했는데 “지난 정부는 북한이라는 특정 교우에게만 좀 집착해왔다”는 대목도 있던 거다. 계획대로 제목에 ‘집착’을 넣었다는 후련함은 잠시, 혼란이 밀려왔다. 국가 최고 지도자가 해외 언론에 전직 대통령을 깎아내린 적이 있었나.
5공화국 때 가택연금을 당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인 시절 “전두환 이 XX”라며 반발했어도 청와대에 입성한 후엔 말을 가렸다. 유신 정권에 납치돼 목숨을 잃을 뻔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험담을 삼갔다. 오히려 외신 기자를 만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개인적 원한도 복수심도 없다”고 했다. 다른 전직 대통령들의 전임 정권 비난도 대선 후보 시절 선거용에 한정됐다. 그것이 국가의 품격과 직결돼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국 언론을 만나 전임자인 도널드 트럼프 흉을 보면 어떨까. ‘콩가루 집안’이라 손가락질당할 거다. 미국 안에서나 민주당, 공화당 구분이 의미가 있지 우리 입장에선 어차피 다 같은 미국 대통령이다. 밖에서 보는 한국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ABM’(Anything But Moon·문재인 정부 정책만 아니면 된다)으로만 보이는 현 정부의 외교는 전략적으로도 패착이다. “문재인 정권이 한일관계를 망쳤다”고 하는 순간, 일본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한일관계 경색의 원인이 한국에 있다는 걸 인정했으니 “우린 만날 생각이 없었는데 한국이 요청해서 만나줬다”(뉴욕 한일 정상회담)는 일본의 조롱을 견뎌야 한다. “사드 3불이 전임 정부의 과오”라고 하는 순간, 중국은 사드 3불을 기정사실화한다. 윤 대통령의 욕설 대상이 “미국이 아니라 한국 국회였다”고 하는 순간, 전 세계인들은 우리 국민을 우습게 본다. 국회는 국민의 대표니까. 영국 공영방송 BBC 시사 프로그램은 이 해명을 코미디 소재로 삼으며 박장대소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상원 외교위원장과 부통령을 지낸 베테랑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외무장관을 5년이나 했다. 3연임이 확실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두 명의 한국 전직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그러나 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윤 대통령은 검사생활 27년이 전부다. 노하우든 시행착오든 이들을 먼저 겪은 전임자에게 조언을 구해도 모자랄 텐데. 외국인 앞에서 험담이나 할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