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안 틀 거야. 당신들이 수많은 라디오 방송국을 화나게 만들었잖아."
지난 3일, 미국의 플로리다주 올랜도 기반 라디오 채널인 WXXL(XL106.7)의 아침 프로그램 진행자들이 남긴 말이 방탄소년단(BTS) 팬인 '아미'를 불쾌하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방송 진행자인 조니 매직과 브라이언 그라임스는 아미를 'BTS 너드(괴짜)'라고 부르면서 현재 미국에서 유행 중인 찰리 푸스와 BTS 정국의 협업곡 '레프트 앤드 라이트'를 틀지 않겠다고 했다. 이들은 해당 곡이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도록 신청하는 팬들을 향해 "짜증난다"고 표현했다.
이어진 사건은 두 가지다. 이 방송의 내용이 온라인으로 알려지면서 '아미'들의 비판을 받자 DJ들은 다음 날 방송에서 사과 입장을 밝히고 해당 곡을 재생하면서 상황을 수습했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팬들 사이에서 '#BTSnerd'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했다. 내용은 비판이 아니라, "몇 살, 무슨 공부를 하고 무슨 일을 한 나는 BTS 너드다"라는 선언적인 내용이다. 앞서 DJ들이 비하의 의미로 사용한 표현을 긍정적으로 전유한 셈이다.
영어 '너드(Nerd)'라는 표현은 사회성이 부족하고 특정한 분야에 몰입한 사람들을 조소하는 의도로 사용됐다. 하지만 인터넷이 확산하고 팬덤 문화가 일반화한 현재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이를 자아 실현의 성공이자, 자기 정체성의 긍정적 동력으로 삼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 인터넷 표현으로는 일본어 '오타쿠'에서 유래한 '덕후'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미국의 라디오 DJ가 BTS의 곡을 트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특히 팬들 사이에서 중대한 문제다. 미국의 아미는 '@BTSx50States'라고 이름 지은 활동을 통해 각 지역 라디오에 사연과 함께 BTS의 곡을 재생하도록 신청하는 운동을 벌여 왔다. 이들의 활동은 BTS의 곡이 북미로 소개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미국 대중음악 차트인 빌보드의 메인 차트 '핫 100'을 산정하는 데 있어 라디오를 통한 방송시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비중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핫 100의 순위는 오프라인 싱글 및 음반 구매량, 곡의 라디오 방송시간, 온라인 스트리밍, 디지털 음원 구매 다운로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산정된다. 유튜브를 통해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빌보드 1위를 차지하지 못한 이유가 매우 낮은 라디오 방송 횟수 때문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BTS뿐 아니라 다수의 한국 곡이 이미 빌보드 차트에서 높은 성적을 냈지만, K팝 곡의 약점은 여전히 라디오 방송 횟수다. 현재 빌보드차트에서 한국 곡들이 얻는 성과는 대부분 온라인 실시간 재생(스트리밍)과 디지털 다운로드에서 온다. 2020년에 BTS의 'On'은 순전히 온라인 데이터로만 '핫 100'에서 4위를 찍었지만, 결국 BTS에게 최초의 '핫 100' 1위를 안긴 것은 그해 라디오에서도 대성공한 '다이너마이트'였다.
K팝 곡을 라디오에 신청하는 팬덤의 활동은 이들을 미국 대중음악 영역으로 폭넓게 소개하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됐다. 하지만 이는 최근 논란이 된 그라임스의 발언이 암시하듯,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DJ들은 K팝 곡을 재생하는 것을 꺼리고, 아미를 비롯한 팬덤의 활동도 불편하게 여긴다.
미국의 인터넷 매체 '복스'를 비롯한 많은 매체들은 서구 미디어에서 K팝에 대한 게이트키핑(뉴스 취사선택 과정)이 존재한다고 본다. 빌보드는 최근 온라인 음원 구매 다운로드의 중복 횟수 반영을 주 4회에서 주 1회로 축소했는데, 이것이 온라인 시장에서 강한 K팝에 대한 견제라는 평가도 있었다.
문화 코드 면에서도 BTS는 미국의 주류 백인이 아닌 아시아계 등 소수인종의 새로운 롤모델이자 남성상을 대표한다. 아시아계 증오범죄가 종종 발생하는 서구에서 K팝 음악을 듣고 권하는 것은 여전히 '정치적'인 함의가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인종차별 반대 메시지를 내놓는 차원에서 BTS를 백악관에 초청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특정한 DJ의 취향이나 인종주의적 문제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측면도 있다. K팝이 라디오에서 고전하는 이유로 가장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언어'다. 순전한 한국어로 된 문화 콘텐츠 중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시청자들이 자막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귀로 듣는 콘텐츠인 라디오에서는 그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BTS의 곡 중 '핫 100' 1위에서 오래 머무른 '다이너마이트'와 '버터'의 공통점은 라디오에서도 성공을 거뒀다는 점과, 가사가 완전히 영어로 된 곡이라는 점이다. '다이너마이트'의 미국 프로모션을 담당한 컬럼비아레코드 역시 이 점을 강조해 라디오 방송국을 상대로 홍보를 펼쳤고 이는 어느 정도 주효했다.
테네시주 채터누가 지역 라디오 방송 DJ '새시'는 BTS를 눈여겨본 K팝 팬으로서 2018년 "BTS가 미국 라디오에서 소개되지 않는 이유"라는 글을 썼는데, 여기서 가장 우선적으로 꼽은 이유가 언어였다. "미국은 영어로 말하는 나라고 단순히 영어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많은 청취자들은 곡이 나오는 것을 싫어할 것"이라고 밝혔다.
'복스'는 이와 함께 K팝을 "10대 문화"로 간주하는 편견을 이유로 들었다. 기본적으로 라디오란 매체는 '성인들의 매체'다. 라디오를 가장 많이 청취하는 이들은 대개 연령대가 높거나 차량을 장시간 운전하는 사람들이다. 미국의 라디오 차트 분석가인 션 로스는 "예를 들어, 카풀이 아닌 이상 어머니와 딸이 같이 라디오를 듣는 일은 거의 없다"고 짚었다. 또 상업적인 이해관계 측면에서도 라디오 방송 관계자들은 '구매력'이 떨어지는 청년 청취자를 핵심 수요로 보지 않는다.
이런 사정 때문에 미국의 라디오 진행자들은 자연히 '새로운 음악'을 소개하기보다는 안전한 선택을 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 분석이다. 이렇게 되면 10대와 20대 사이에서 음악 장르나 곡이 유행하는 곡은 라디오 DJ 입장에서는 오히려 회피해야 할 곡으로 느낄 수도 있다. 이런 문제는 K팝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차트 분석가 크리스 몰랜피는 "해리 스타일스나 조나스 브라더스 같은 아티스트도 인기 최절정기를 지난 이후 '성인 스타'로서 확립된 뒤에야 차트순위 1위를 달성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대중음악계에도 한때 아이돌 음악을 '10대 문화'로 간주하고 기존 음악에 비해 상업성이 짙고 질적 성취는 낮은 것처럼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시대가 바뀌면서 자연히 사라졌다. 현재 국내 아이돌 그룹의 팬들 중에서 30대와 40대 팬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반면 서구에선 심지어 팬들 자신조차 '성인으로서 K팝 팬은 이상하다'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워한다. 영어권 인터넷 커뮤니티인 '레딧'에서 "20대에 K팝 그룹 팬을 하는 것이 이상한가"와 같은 질문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진정한 리스너"를 자처하는 미디어 인사들이 K팝을 '어린애들의 관심사'로 보는 풍조도 남아 있다. 2021년 독일 바이에른주 라디오방송 '바이에른3'의 진행자 마티아스 마투시크가 BTS가 록밴드 콜드플레이의 곡을 커버한 것을 "신성 모독"이라고 조롱한 사건은 인종주의적 편견도 작용했지만, 결국 한국의 보이밴드 음악을 진정한 아티스트로 보기 어렵다며 비하하는 시선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해시태그 '#BTSnerd'를 사용하는 이들이 자신의 연령과 직업, 개인적 삶의 성취를 공유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BTS의 팬이 미국 미디어의 편견대로 '나이 어린 소녀'만이 아니라는 증명의 일환이자, 특정한 세대나 그룹에 국한되지 않고 누구나 BTS의 팬으로서 그들의 음악을 듣고 지원할 수 있다는 선언인 셈이다. 이들은 "BTS를 통해 삶의 동력을 얻었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뤘다"고 밝히면서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