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는 비슷한 출력을 내는 내연기관 차량보다 초반 가속력이 빠르다. 엔진의 분당 회전수(RPM)를 높이면서 기어를 변속해야 하는 내연기관 차량과 달리, 전기차는 처음부터 최대 토크로 출발할 수 있다. 때문에 전기차의 직진 주행 성능은 내연기관 차량을 앞선다는 평이 많다.
레이싱 경기장(서킷)에선 이야기가 달라진다. 구불구불한 코너가 많고, 잠시 멈췄다 다시 속도를 높이는 과정을 자주 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히 빠르기만 해서는 안된다. 업계 관계자들은 그래서 무겁고, 배터리·브레이크 열 관리가 어려운 전기차는 서킷 주행에서 한계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아가 그 벽을 넘어선 전기차를 내놓았다. 현대자동차그룹의 첫 번째 고성능 전기차이자,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에서 가장 빠른 차 'EV6 GT'가 그 주인공이다.
4일 충남 태안군에 위치한 'HMG 드라이빙 익스피리언스 센터'에서 EV6 GT의 주행 성능을 직접 느껴봤다. 이번 시승은 EV6 GT가 수치로 보여지는 것만큼 뛰어난 성능을 갖췄는지 알아보는데 집중했다. 특히 다른 전기차처럼 직진에서만 빠른 것이 아니라, 코너링·핸들링 성능도 뛰어나다는 기아의 주장을 확인했다. 이를 위해 ①마른 노면 서킷 ②젖은 노면 서킷 ③400m 드래그(가속력 대결) ④짐카나(짧은 구간에서 가속·감속·코너링 대결) ⑤고속주회로 등 다양한 코스에서 EV6 GT를 타봤다.
EV6 GT는 430㎾(585마력)의 최고 출력과 740Nm(75.5㎏f·m)의 최대 토크를 갖췄다. 사륜구동 시스템으로 뒷바퀴에서 270㎾, 앞바퀴에서 160㎾ 출력을 낸다. 덕분에 멈춘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3.5초 만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초반 가속도는 포르쉐 스포츠카 '911 카레라'(4.0초), 전기 스포츠카 '타이칸 GTS'(3.7초) 등보다 빠르다.
가장 먼저 달려본 곳은 3.4㎞ 구간에서 총 16개의 코너로 구성된 마른 노면 서킷이다. EV6 GT의 주행 성능은 기대 이상이었다. 스포츠 모드로 코너 구석구석을 공략할 땐,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각이 작은 코너에선 속도를 거의 줄이지 않고 차량이 미끌어지는 것을 최대한 이용했다. U자 형태로 각이 큰 코너에선 최대한 속도를 줄여 진입하고,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아서 탈출했다.
짐카나에선 좀 더 섬세한 핸들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길이가 650m밖에 안 되는 구간에서 장애물을 연속해서 피하고, 원 선회 구간을 지나 급가속과 급정거를 경험했다. 차량이 왼쪽, 오른쪽으로 심하게 쏠릴 때도 안정적으로 코스를 빠져나갔다. 운전자가 원하는 만큼 꺾이고, 달리는 느낌이었다.
직진 성능은 예상보다 더욱 뛰어났다. 고속주회로에서 GT모드로 바꾸고, 출발과 함께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속도는 순식간에 시속 200㎞를 넘었다. 이날 계기판에 찍힌 최고 속도는 시속 263㎞로, 제원에 있는 최고속도(시속 260㎞)를 넘어섰다. 초반 가속도를 알 수 있는 400m 드래그에선 정지 상태에서 3.6초 만에 시속 100㎞를 주파했다. 급가속할 땐 만약 블랙홀로 빠져들어간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EV6 GT가 이처럼 서킷에서 잘 달릴 수 있는 것은 ①강성 높은 차체 ②전자제어 서스펜션(ECS) 덕분이다. 특히 ECS는 차량의 주행 조건, 노면 상황에 맞춰 감쇄력을 조절, 안성맞춤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한다. 또 다른 비결은 ③뒷바퀴에 적용된 전자식 차동제한장치(e-LSD)다. e-LSD는 강력한 후륜 모터의 힘이 뒷바퀴에 전달됐을 때 불안정한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달릴 때 역동성을 극대화한다. 또 접지력이 높은 바퀴에 좌우 구동력을 자동으로 나눠 코너링 시 높은 출력을 온전히 낼 수 있게 한다.
달리다 멈출 때 성능도 돋보였다. 대부분 전기차는 제동력이 아쉽다. 회생제동장치가 초반 제동을 담당하고, 더 큰 제동력이 필요할 때 브레이크가 힘을 보태기 때문이다. 때문에 브레이크 크기도 작고, 회생제동장치 성능도 힘보다는 연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EV6 GT는 다르다. 슈퍼카에나 달리는 4피스톤 캘리퍼(브레이크 디스크를 잡는 부품)를 쓰고, 회생제동장치 강도도 높였다. 특히 GT모드에선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는 것만으로도 회생제동장치가 힘차게 작동한다. 덕분에 전기차의 단점으로 꼽히던 제동력과 브레이크 열관리가 모두 좋아졌다.
EV6 GT는 "전기차로 서킷을 달리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인식을 깨트리기 충분했다. 7,200만 원의 가격도 성능을 고려하면 합리적이다. 비슷한 성능을 내는 내연기관차량은 2억~3억 원을 호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