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에서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니 두 개의 봉분이 위아래로 위치하고 있다. 앞 묘비에 ’의암신안주씨지묘(義巖新安朱氏之墓)’라 적혀 있다. 성씨만 쓴 것으로 보아 여성의 묘다. 뒤의 묘비에는 ‘해주최공경회지묘(海州崔公慶會之墓)’라는 이름이 또렷하다.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해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절한 최경회 장군의 묘다. ‘신안 주씨’는 바로 주논개를 일컫는다. 최경회와 동행했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촉석루 술자리에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인물이다. 도로 이정표에는 ‘논개 묘’라 해 놓고, 막상 현장에는 안내판 하나 없으니 '신안 주씨'가 논개임을 알아볼 사람이 많지 않을 듯하다.
논개 묘가 위치한 곳은 함양군 서상면 방지마을이다. 함양과 장수를 잇는 고갯길 육십령 바로 아래다. 논개의 사당은 그의 고향 장수읍에 조성돼 있다. 묘는 장수군의 의암사적보존회와 경상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및 향토 사학자들의 고증을 거쳐 1976년 현재 위치로 특정됐다. 1980년대 후반 봉분을 다시 만들고 주변을 정비했다. 아쉬운 건 묘비뿐이 아니다. 지난달 29일 방문객 없는 넓은 주차장엔 가을 햇빛만 쓸쓸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육십령(734m)의 유래는 3가지로 전해진다. 우선 고갯마루까지 60굽이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야 한다는 설이 있다. 지금은 바로 아래로 대전통영고속도로 터널이 뚫렸고, 한적해진 기존 국도로 차를 몰아도 높고 험한 고개라는 걸 실감하지 못한다.
장수감영이나 안의감영(현 함양 안의면)에서 60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옛날부터 이 고개를 넘다가 도적들에게 재물을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최소 장정 60명이 모여야 한다는 데서 ‘육십령’이 됐다는 설이 가장 그럴싸하다.
현재 육십령마을은 함양 땅에 있지만, 여행객을 위한 쉼터는 장수군에 위치한다. 바로 아래로 넓은 고원이 펼쳐지고, 뒤편으로 우람하면서도 부드러운 능선이 감싸고 있다.
육십령은 남덕유산(1,507m)과 그 남쪽의 백운산(1,279m)으로 연결되는 능선에서 말 안장처럼 낮은 길목이다. 남덕유산 동쪽 줄기의 남령재를 넘으면 거창 땅이다. 남령재 바로 아래에 영각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다. 신라 헌강왕 3년(877)에 창건했고, 조선조 세종 31년(1449) 중창한 오래된 사찰이다. 주변에 13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린 큰 도량이었지만, 한국전쟁 때 전소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화엄경판 81권 3,284판이 불에 탄 것은 큰 문화재적 손실로 언급된다.
남덕유산 등산로 초입에 위치한 사찰은 현재 넓은 터에 네댓 채의 전각이 엉성하게 자리하고 있어 고찰의 풍모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곳간이었던 구광루의 낡은 기둥과 창문이 눈길을 잡는다.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로는 드물게 2층으로 지었는데, 쓰임이 줄어 1층은 온돌방, 2층은 강당으로 변경됐다. 근래에 보수하면서 2층 누각에 중국식 창호를 설치해 특이해 보이지만 문화재로서의 격이 떨어진다는 평가다. 구광루 정면으로 멀리 보이는 지리산 능선만은 여전히 일품이다. 방문객 없는 절 마당에 코스모스만 하늘거린다.
영각사 바로 아래에 ‘문태서의병장 역사공원’이 있다. 서상면 출신 문태서(1880~1913)는 1907년 제3차 한일협약으로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덕유산으로 들어가 의병을 조직했다. 그의 부대는 이듬해 무주에서 일본군을 습격해 40여 명을 사살하고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것을 비롯해 장수·남원·진안 등 전북에서 관공서를 습격하며 전과를 올렸고, 충북 영동·옥천·금산·보은으로 진군해 유격전을 전개했다.
호남의병단이 계속해 전과를 올리자 1909년 4월 무주군민들이 구천동에 그의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철거당했다. 항전 중 의병장의 공덕비를 세운 것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무주에 세웠던 공덕비를 재현한 것을 시작으로 역사공원에는 1912년 체포돼 이듬해 옥중에서 자결하기까지 장군의 항일 공적을 두루 정리해 놓았다. 논개 묘와 마찬가지로 잘 단장된 이곳에도 방문객 하나 없이 가을볕만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서상면 아래 서하면에도 정유재란 때 왜군에 맞선 유적이 있다. 황석산(1,192m) 꼭대기의 황석산성이다. 가파르고 등산로가 험해 함양군에서조차 홍보에 공을 들이지 않는 곳이다. 전술적 지식이 부족한 사람으로서는 그 높은 산꼭대기에 왜 산성이 필요했으며, 왜군은 왜 굳이 이곳까지 올라가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는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안의현이 전라도 곡창지대로 진출하기 위해 꼭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다는 점과, 보급로가 끊길 것을 걱정해 후한을 없애려 했을 거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황석산에 오르는 가장 짧은 등산로는 남강 상류 우전마을에서 시작된다. 마을을 통과해 시멘트 포장 임도를 따라 가면 예닐곱 대 댈 만한 작은 주차장이 있다. 등산객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터가 닦인 듯하다. 황석산은 지리산과 남덕유산을 보유한 함양에선 대수롭지 않은데, 한 스포츠 의류업체에서 지정한 ‘한국의 100대 명산’에 포함돼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제법 알려져 있다.
주차장에서 정상까지는 약 2.6㎞다. 황석산을 오를 때는 머릿속에서 잠시 시간과 거리의 상관관계를 지우는 게 좋겠다. 미리 말하면 오르는 데만 1시간 40분이 걸렸다. 중간중간 자주 쉴 수밖에 없었다. 짧은 구간에서 표고를 600m 이상 높여야 하는 길로, 한치의 에누리 없이 정직한 오르막이다.
시작 지점의 짧은 계단을 제외하면 대부분 돌길이다. 다듬어진 계단도 드물고, 거친 바위 위로 난 흔적을 따라 걷는다. 때로는 유격훈련처럼 나무기둥에 맨 밧줄을 타야 한다. 다행히 그늘이 짙어 정상을 제외하면 땡볕에 노출되지 않는다.
약 700m를 걸으니 계곡 위로 높이 수십 미터의 거대한 암벽이 나타난다. 떨어지는 계곡물이 암반을 다 덮지 못하고 겨우 귀퉁이만 적시며 미끄러진다. 바로 옆에 ‘피바위’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선조 30년 정유년(1597) 조선을 다시 침략한 왜군 14만 명 중 2만7,000명이 음력 8월 16일 가또, 구로다 등의 지휘로 이곳 황석산성을 공격해 왔다. 안의현감 곽준과 함양군수 조종도는 소수의 병력과 인근 7개 고을 주민을 모아 성을 지킬 것을 결의했다. 관민이 혼연일체가 돼 조총으로 공격하는 왜군에 맞서 활과 창칼 혹은 투석으로 처절한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이틀 후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돌을 나르고 부서진 병기를 손질하는 등 온 힘을 다한 여인들은 성이 함락되자 수십 척의 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그때에 흘린 피로 벼랑 아래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 해서 피바위라 한다. 이 어찌 한스러운 비극이 아니겠는가.”
활을 쏘고, 창과 돌을 던지다 끝내는 몸을 던져 저항한 민초들의 피맺힌 한이 서린 바위다. 아래 우전마을도 서글픈 이름이다. 성이 함락된 후 수백 명이 절벽에서 뛰어내렸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아 ‘우라터’로 불리다 우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산성의 흔적은 피바위에서 올라온 만큼 더 가야 보인다. 잠시 복원한 석성을 따라 걷다가 등산로는 성 안쪽으로 연결된다. 다행히 완만한 오르막에 흙길이다. 이 산중에 어떻게 사람이 살까 싶은데 구릉이 의외로 넓고 아늑하다. ‘집터’였다는 팻말은 있는데 집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정상까지 600m는 다시 가파른 오르막이다.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며 능선에 닿자, 아래서부터 이어진 석성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깎아지른 바위 능선의 빈틈을 돌을 쌓아 이었다. 맨몸으로 오르기도 힘든 산꼭대기까지 올라와 이렇게까지 처절해야 했을까 생각하면 절로 숙연해지는 풍경이다. 현재 파악된 바로는 성의 둘레가 2.75㎞인데, 동국여지승람에는 2만9,240척(약 8.9㎞)에 이른다고 기록돼 있다.
산 정상은 커다란 바위 군상이 차지하고 있어, 그 흔한 표석도 전망대도 없다. 조심스럽게 암반에 걸터앉으면 남측으로 휘어진 석성과 암벽이 능선을 형성한다. 그 뒤로 골짜기마다 들어선 마을과 황금빛으로 변한 가을 들판이 눈부시고, 지리산의 높고 낮은 산줄기가 첩첩이 감싸고 있다. 거리에 따라 희미해지는 농담이 한 폭의 수묵화다. 이 강토를 지키고자 처절하게 싸운 민초들의 피와 눈물을 떠올리기 힘든 절경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산하가 차라리 눈물겹다.
우전마을 아래 개울가에는 거연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물길 따라 정자가 몰려 있는 화림동 계곡에서도 빼어난 곳으로 평가된다.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가 1640년경 암반 위에 지은 정자로, 건물 양쪽으로 맑고 푸른 물이 흐른다. 시절이 달라 황석산성과 연관 짓는 게 무리지만, 그 풍류의 현장에 자꾸 피바위의 눈물 자국이 중첩된다. 정자의 주인은 이름을 남겼지만 산성에서 스러져 간 500여 민초들은 끝내 이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