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가 세계 금융 시장에 대혼란을 불러온 감세 조치 일부를 철회하기로 했다. “경제 성장동력을 되살리겠다”며 반세기 만에 최대 규모 감세안을 내놨지만, 영국발(發) 금융위기 우려가 커지고 정권 위기로까지 번지자 발표 열흘 만에 한발 물러난 것이다.
야심 차게 꺼내든 정책이 시작부터 ‘굴욕적 후퇴’를 마주하면서 출범 한 달도 안 된 리즈 트러스(47) 총리 리더십에도 적지 않은 상처가 남게 됐다.
3일(현지시간) BBC방송 등에 따르면, 쿼지 콰텡 영국 재무장관은 성명을 내고 감세 계획 중 최고세율을 45%에서 40%로 낮추기로 했던 방안을 백지화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콰텡 장관은 “기업 지원과 저소득층 세 부담 감면 등 우리의 성장 계획은 더 번영하는 경제를 위한 새로운 접근법이었다”면서도 “다만 45% 세율 폐지안으로 영국이 직면한 도전을 극복하려던 우리의 임무는 산만해졌다”고 밝혔다.
앞서 트러스 내각은 지난달 23일 연 450억 파운드(약 69조 원) 규모 대규모 감세 계획을 발표했다. 1972년 이후 50년 만에 최대 규모다. △최고세율 45%→40% 인하 △소득세 기본 세율 20%→19% 인하 △인지세(주택취득세) 주택 가격 기준 상향 등의 내용이 담겼다. 감세를 통해 경제 성장을 유도하고 물가를 잡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금융시장은 큰 충격에 빠졌다. 영국 중앙은행 영란은행(BOE)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긴축 기조로 돌아선 상황에서 정부가 감세로 돈을 풀어 경기부양을 하겠다는 엇박자 계획을 내놓자 혼란이 야기된 것이다. 특히 정부가 부족해지는 세수를 어떻게 메울지 구체적 계획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시장 불안은 더 커졌다. 결국 영국 정부 재정이 파탄 날 수 있다는 우려에 파운드화 가치는 40년래 최저치로 급락했다.
파운드화가 흔들리자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국채 투매가 벌어졌고 국채 금리도 치솟았다. 지난달 27일 영국 국채 5년물 금리는 4.699%를 기록했는데, 이는 유럽의 병자(病者)로 불리던 ‘부채 과다국’ 그리스나 이탈리아 국채 금리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영국 경제를 보는 외부 시선도 불안해졌다. 선진국 경제 정책에 간여하지 않던 국제통화기금(IMF)까지 이례적으로 정책 철회를 촉구했고, 미국 재무부도 간접적으로 감세안에 대한 우려 의사를 밝혔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푸어스(S&P)는 영국 국채 신용등급 전망을 최근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금융시장 불안은 실물 경제로도 전이되기 시작했다. 금리 급등에 따른 부실 증가를 우려한 영국 주요 은행들이 위험(리스크) 관리를 위해 줄줄이 주택담보대출(모기지) 금리를 대폭 올리거나 아예 중단하면서 영국 부동산 시장에도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크라이나 전쟁이 불러온 에너지난으로 생계난이 증가하던 차에 ‘정권 헛발질’로 타격이 더욱 커지면서 민심은 빠르게 식었다. 특히 영국인들은 ‘부자 감세’에 분노했다. 45% 세율이 적용되는 소득 구간은 성인 인구의 1%가량인 50만 명이다. 고소득층인 이들의 세입 규모는 60억 파운드(약 9조6,000억 원) 수준이다. 상위 1%의 세금 인하를 위해 정부가 파운드화 가치 추락, 고금리·고물가 등을 용인하고 있다고 본 셈이다.
경제 문제는 정권 위기로까지 번졌다. 최근 영국 여론조사에서 집권 보수당 지지율은 노동당에 33%포인트까지 밀렸다. 당내에서조차 감세 반대 목소리가 이어졌다. 안팎의 거센 압박에 결국 정부가 두 손을 든 셈이다. 외신들은 이날 한목소리로 “트러스가 굴욕적인 유턴을 강요당했다”고 지적했다.
정치적 후폭풍은 거세질 전망이다. 이날 최고소득세 인하 계획 철회는 트러스 내각이 취임 첫 카드로 내놓은 성장 전략이 실책이었음을 사실상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니콜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정부 수반은 “정책 유턴은 (트러스) 정부의 완전한 무능을 드러낸다”고 꼬집었다.
이날 정부의 발표 이후 야당에서는 트러스 총리와 콰텡 장관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기도 했다. BBC방송은 “트러스와 콰텡은 (정치적) 부상과 굴욕을 입었다”며 “출범 한 달도 안 된 정부의 또 다른 결정적 순간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