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의 속삭임에 귀를 대다

입력
2022.10.03 04:30
19면

만 28세 청년 프랭크 드레이크(Frank Drake)가 1958년 웨스트버지니아 그린뱅크의 미 국립전파천문대(NRAO)에 취업했다. NRAO는 일반 망원경으로 별빛을 관측하는 ‘광학 관측’이 아니라 천체가 발산하는 전자기파를 관측(전파 관측)해 우주의 비밀을 밝히고자 미국과학재단(NSF)이 56년 설립한 첫 전파천문대. 전파 관측의 잠재력과 효용 등 모든 게 불분명하던, 전파천문학의 태동기였다.

드레이크는 NRAO 초대 관장 오토 스트루브(Otto Stuve, 1897~1963)에게 ‘황당한’ 야심을 밝혔다. 당시 천문대에 단 하나밖에 없던, 갓 조립한 직경 85피트(26m) 전파망원경 ‘테이텔(Tatel)’로 외계인의 흔적을 찾겠다는 거였다. 외계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 역시 전파를 쓸 것이고, 그 전파는 천체의 자연 전자기파와 달리 목적과 용도에 맞춘 좁은 파장(협대역)에 주기성을 띨 테니 그걸 탐색하겠다는 거였다. 앞서 벨연구소의 물리학자 겸 전파공학자 칼 잰스키(Karl G. Jansky)가 1931년 은하 중심 궁수자리 근처에서 발산되는 묘한 전파 잡음을 포착, 1년여 간 확인을 거듭한 끝에 33년 그 사실을 세상에 공개한 적이 있었다. 미국 언론은 그 주장을 비교적 유보적으로 보도했지만, ‘우주에서 라디오 소리가 전해졌다’는 식의 선정적인 보도도 없지 않았다. 불과 10여년 전까지 ‘화성에 대운하가 있다’는 주장이 그럴싸하게 떠돌던 시절이었다.

그 '사이비'의 반작용으로, 진지한 천문학자 가운데 과학자로서의 평판과 경력까지 걸고 외계인이나 외계문명 탐색을 언급하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갓 받은 드레이크가 그 경계를 넘어선 거였다. 스트루브는 “소문 안 나게”라는 조건을 달아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고 한다. 훗날 드레이크는 “그 프로젝트는 천문학계의 터부였고, 다들 두려워서 탐색에 나서는 이가 없었다”고 “나는 너무 멍청해서(too dumb) 두려울 게 없었다”고 말했다.

인류 최초의 외계 지적생명체 탐색 프로젝트가 그렇게, 자칭 한 “멍청한” 천문학자에 의해 59년 시작됐다. ‘오즈마(Ozma) 프로젝트’였다. '오즈마'는 프랭크 바움의 판타지 소설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만난, 마법 세계의 ‘다른 존재’다.

구소비에트가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1957)를 쏘고, 이듬해 미국이 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하면서 ‘우주 냉전’이 본격화하던 때였다. 갓 출범한 NRAO도 이목을 끌 수 밖에 없었고, 드레이크의 은밀한 외도도 이내 꼬리가 밟혔다. 하지만, 정부 천문기관의 ‘공식’ 외계인 탐색 프로젝트에 대한 언론과 시민 반응은 뜻밖에 우호적이다. 그의 프로젝트를 공론화하기로 한 미 과학아카데미(NAS)는 드레이크에게 관련 학자들을 초청해 프로젝트의 현실적 타당성과 가능성을 검토하는 워크샵을 주선하게 했다. 61년 여름, 기라성 같은 과학자 12명이 NRAO에 모였다. 오토 스트루브를 포함, 칼 세이건과 그 해 노벨상을 수상한 생물(발생)학자 멜빈 캘빈, 돌고래 의사소통 연구자 존 릴리 등이었다. 자칭 ‘돌고래단(Order of the Dolphin)’이라 불렀다는 그들은 그해 말까지 여러 차례 난상토론을 벌였다.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 공식(E=mc²)에 버금갈 만큼 유명하다는 ‘드레이크 방정식’이 처음 공론화된 것도 그해 11월 1일, 저 모임에서였다. 은하계에서 1년에 생성되는 별의 갯수와, 각 별에 행성이 존재할 확률, 행성에서 생명체가 탄생해 문명체로 진화하고, 통신 기술을 획득할 확률, 문명의 존속 기간 등 7개 변수를 곱해서 지구와 교신이 가능한 문명의 수를 구하는, 일명 ‘은하 인구조사 공식’.
드레이크는 62년 ‘우주의 지적 생명(Intelligent Life in Space)’이란 책을 출간했다. 그는 책에 이렇게 장담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외계 지적 문명이 보내오는 전파는, 거의 확증적인 확률로 지구로 쏟아지고 있다. 적절한 방향에, 적절한 주파수에 맞춘 전파망원경만 있다면, 그걸 포착할 수 있다. 인류가 던져온 가장 오래된, 무엇보다 중요하고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언젠가, 저 별들 중 어딘가로부터 듣게 될 것이다.
46억 년 지구의 시간에서 현생 인류가 탄생한 건 불과 30만~35만 년 전이고, 그들(우리)이 전파를 활용한 건 채 200년이 안 된다. 그 희박한 확률에도 불구하고 드레이크가 저 공식으로 외계 지적생명체와의 교류를 확신한 근거는, 무수한 별과 더 무수한, 거의 무한대의 행성이 존재하리라 판단해서였다. 인류는 1992년 첫 외계행성을 발견한 이래 지금까지 5,000개가 넘는 외계행성을 찾아냈다. 우리 은하에만 최소 1,000억 개의 별이 존재하고, 그 중 1/10만 태양처럼 행성을 거느린다 쳐도 은하계 내 행성은 1,000억 개가 된다. 그리고, 우리 은하 너머에는 1,000억~4,000억 개의 다른 은하가 또 존재한다.

세티 프로젝트는 그렇게, 외계인을 SF 소재에서 과학 연구의 장으로, 생명의 우주를 철학과 종교의 상징적 제단에서 전파망원경의 접시 위에 펼쳐 놓았다. 그 우주의 처음을 열고 오늘 선 길을 닦는 데 기여한 프랭크 드레이크가 9월 2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드레이크는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 52년 코넬대(공학물리학)를 졸업, 해군 순양함 정보통신장교로 3년 복무한 뒤 하버드대 천문대학원에 진학했다. 화공기술자 아버지는 어린 드레이크에게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고 한다. 그는 하버드대 최초 이과대학 여성 정교수로 갓 부임한 세실리아 페인가포슈킨(1900~1979)의 지도로 5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태양을 암석 항성이라 여기던 당대 학계 거물들의 통념에 맞서, 빛 스펙트럼 분석을 통해 수소-헬륨의 기체 항성인 사실을 밝혀 꽤 험한 수모를 겪었던 페인가포슈킨이었기에, 드레이크의 엉뚱함을 용인해줬을지 모른다. 드레이크는 대학원 시절에도 플레이아데스 성단 주변을 전파망원경으로 탐색해 ‘기이한 신호(curious signal)’를 포착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상 전파오염으로 밝혀졌지만, 잠시나마 그는 아버지의 이야기 속 ‘우주의 다른 세상’ 혹은 오즈마의 세상을 발견한 양 흥분했을 것이다.

그는 NRAO를 거쳐 미국의 유인 달 탐사(아폴로) 프로젝트를 도와 NASA 제트추진연구소에서 잠깐 근무한 뒤 코넬대(64~84), 산타크루스 캘리포니아대(84~96) 교수를 지냈고, 푸에르토리코 아레시보천문대 관장(66~68), 아레시보 천문대 관리를 위임 받은 코넬대 국립천문센터 소장(71~81) 등을 역임했다. 칼 세이건 등 동료 세티 과학자들과 함께 NASA의 우주탐사 계획에도 수시로 합류해 세티 프로그램을 접목했다. 72년 심우주 탐사선 파이어니어 10, 11호에 실어 보낸 메시지 디스크도 그들이 구상해서 만든 작품. 외계에서 오는 전파신호를 찾는 ‘세티’와 달리 우리가 먼저 전파나 메시지를 외계로 보내는 걸 ‘메티(Messaging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프로젝트’라 한다. 디스크에는 태양계 내 지구의 위치와 남녀 인간의 형상 등 그림이 담겼다. 77년 보이저 1, 2호에 실린 금박 구리디스크 ‘지구의 소리(the sound of Earth)’도 그들 작품이었다. 드레이크는 보이저호 기술 책임자(technical director)였고, 칼 세이건의 아내 앤 드루얀(Ann Druyan)도 남편과 함께 거기 있었다. 앤 드루얀은 “프랭크가 없었다면 레코드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인류 문화의 ‘노아의 방주’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 사이 드레이크는 자신이 운영하던 아레시보 천문대 전파망원경으로 약 2만5,000광년 너머 30만 여 개의 별이 모인 ‘헤라클레스 구상성단(M13)’을 향해 파이어니어 메시지의 상세 버전 격인 이른바 ‘아레시보 메시지’를 송출했다. 격자 모양의 그림과 1,679개 0과 1 이진 코드로 구성된 메시지에는 태양계 및 지구 위치와 인간 형상 외에, 인구 수와 인간의 평균 키, DNA 구조와 염기쌍 샘플 등을 담았다. 그는 그 메시지를 칼 세이건 등 코넬대 동료들에게 먼저 보내 해독이 가능한지 물어봤다고 한다. 모든 데이터를 해독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세티 프로젝트에는 수많은 비판과 난관이 있었다. 지구와 인류 문명은 고유하고 또 고유해야 한다는 종교적- 원리주의적 비판, 기아와 질병 등 인류의 절박한 문제들도 많은데 일부 과학자들의 야심을 위해 무모하고 당장 쓸모도 없는 연구에 그 많은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는 게 타당하냐는 도구주의적 비판. 더러 흥분되는 순간들은 있었지만, 아직 외계인의 흔적이라 할 만한 물증을 단 한 건도 찾지 못한 사실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1971년 NASA가 추진한 ‘키클롭스(Cyclops) 프로젝트’, 즉 1,000광년 이내의 항성을 탐색할 수 있는 직경 100m 짜리 전파망원경 1,000개를 건립하려던 계획이 대표적인 예였다. 예산 100억 달러를 들여야 하는 그 계획은 미 의회에 의해 무산됐다. 상원의원 윌리엄 프록스마이어(William Proxmire)는 매년 대표적인 예산 낭비 사례를 선정해 수여하던 ‘황금양모상(Golden Fleece Award)’의 그 해 수상자로 ‘키클롭스 프로젝트’를 선정했다. 코넬대 교수로 아레시보 천문대 관장을 맡고 있던 드레이크는 프록스마이어를 ‘평평한 지구 학회(Flat Earth Society)’에 가입시키는 것으로 ‘보복’했다.) NASA가 92년 재추진한 ‘고해상도 마이크로파 조사’ 프로젝트 역시 상원에서 ‘세금 낭비’란 지적을 받고 폐기됐다.

드레이크와 세티 과학자들은 휴렛 패커드의 윌리엄 휴렛, 인텔사 공동설립자인 고든 무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폴 앨런 등의 후원을 받아 1,000개의 항성 주변을 탐색하는 이른바 ‘피닉스(Phoenix) 프로젝트(1995~2015)’를 진행했고, 근년에는 러시아 사업가 겸 박애주의자 유리 밀너(Yuri Milner)의 후원으로 ‘브레이크스루 리슨(Breakthrough Listen)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지구와 인류의 존재가 외계에 알려지는 게 좋을 게 없다는 비판도 있다. ‘브레이크스루 프로젝트’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스티븐 호킹도 그런 우려를 드러낸 바 있다. 그는 2010년 디스커버리 채널 인터뷰에서 “외계인과 교신하는 것은 지구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그들이 우리를 방문하는 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에 상륙하는 것과 흡사할 것이고, 그건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드레이크의 생각은 물론 달랐다. 수천, 수만 광년 너머의 미지의 그들이 지구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기술적, 시간 공간적 제약은 접어 두더라도, 그들은 이타적인 존재이리라 그는 여겼다. 과학저술가인 딸 나디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마도 외계인은, 우리처럼, 오랜 기간 우주를 향해 강력한 전파를 송신했을 것이다. 그 행위는 그 자체로 이타적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자신들에게 아무 이득이 없는 행위이며, 다만 옳고 타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타주의는 아주 드물긴 하지만, 모든 걸 바꾸기도 한다”고 말했다.

음악교사 어머니에게서 배운 아코디언 실력으로 어릴 적 이탈리아인들의 결혼식장 연주로 용돈을 벌기도 했다는 드레이크는 대학 졸업 이듬해인 53년 작곡가 겸 음악비평가(Elizabeth Bell)와 결혼, 아들 셋을 낳고 76년 이혼했고, 78년 국립과학아카데미에서 만난 아말 샤카시리(Amahl Shakhashiri)와 재혼해 딸 둘을 낳고, 만 44년 해로했다. 뉴욕 주 이타카에 살던 80년대 어느 크리스마스 밤에 어린 딸들에게 루돌프 사슴 코를 보여주기 위해 셀로판지 씌운 플래시를 들고 마당을 뛰어다닌 적이 있을 만큼 가정적이었고, 사교적이고 겸손했다고 한다. 외계 탐사 여정을 기록한 책 ‘Out There’의 작가 마이크 월은 세티연구소에 기고한 부고에 “드레이크는 과학 연구의 한 영역을 개척한 거장으로서 으스대는 기미를 조금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것도 그의 위대한 유산 중 하나였다”고 썼다. 보석 세공 기술을 익혀 직접 만든 장신구를 가족과 친구들에게 선물하곤 했고, 집에서 담근 레드와인으로 뉴욕주 와인경연대회서 몇 차례 상을 타기도 했다고 한다.
드레이크는 96년 대학서, 2010년 세티연구소에서 은퇴했지만, ‘세티’를 멈춘 건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