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믿자”는 구호만으로 정의가 실현될까

입력
2022.09.30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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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이 여성에게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가 제기될 때 성범죄가 일어났다는 물증이 없는 경우가 많다. 서구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을 믿자”는 구호를 외친 이유가 그 때문이다. 반면 남성이 무고의 희생자가 되는 상황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여성을 믿자"는 구호가 무죄추정의 원칙을 위반한다고 비판한다.

신진 페미니스트 사상가로 주목받는 아미아 스리니바산은 최근 국내에 출간된 에세이 모음집 ‘섹스할 권리’에서 그 구호가 법 제도 아래서 거짓말쟁이 취급받기 쉬운 여성에게 지지를 표하는 제스처라고 변호하면서도 "날이 무딘 도구"라고 꼬집는다.

그래서 저서는 논쟁적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직면한 문제들을 세세하게 분리해 현미경을 들이댄다. 예컨대 '여성을 믿자'는 구호는 필요하지만 그것만 강조될 때 인종차별이나 공권력 남용에 의해서 특정 계층이 가해자로 몰리는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지적이다. 흑인 남성이 대표적이다. 뉴욕주의 명문 콜게이트대에서는 2013, 2014년도 학생 중 4.2%만 흑인이었지만 성폭력 고소를 당한 학생의 50%가 흑인이었다. 저자는 "콜게이트대에서도 '여성을 믿자'가 정의를 구현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계급이나 인종 문제 등 복합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성차만을 다룰 경우 페미니즘이 결국 부유한 백인 여성이나 상류계급 여성의 필요에 이바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책은 이 밖에도 포르노 문제나 대학교수와 학생 간 성행위 등 민감한 주제까지 다루면서 개인적인 문제로 보이는 성과 섹스도 실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힘이 작동하는 영역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인도 출신인 저자는 37세에 영국 옥스퍼드대 치첼리 석좌교수로 부임한 촉망받는 신진 철학자다. 이샤아 벌린 등 저명한 학자들에게 주어진 이 자리를 여성이자 비백인이 맡은 건 처음이다. 그의 첫 저서인 '섹스할 권리'는 미투 운동 이후 부흥한 페미니즘을 두고 제기된 여러 논쟁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어 페미니즘이 당면한 여러 고민과 난관들을 살펴볼 수 있다.


김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