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이 비껴 내리쬐던 22일 오후, 가느다란 코스모스 꽃대는 방향 없이 하늘거리고, 보푸라기처럼 부푸는 억새는 햇볕을 한껏 빨아들여 하얗게 부서졌다. 제천 수산면 옥순봉 생태공원에는 이 찬란한 가을을 만끽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골골마다 흩어진 주민을 모두 합해봤자 2,000명 남짓, 마을은 산골짜기로 멀찍이 물러나 터를 잡았다. 지명처럼 수산면에는 물도 많고 산도 많다. 많기만 한 게 아니라 맑고 깊고 높고 수려하다. 호수는 푸르고 기암괴석은 웅장하니 이 땅의 주인은 분명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다.
수산면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그래서 내세우는 게 ‘슬로시티’다. 면소재지 언덕에 조성한 공원에 느림보 달팽이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빨강 초록의 강렬한 장식과 그 사이로 보이는 빛바랜 마을 풍경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마을 아래 남한강과 맞닿은 지점에 조성한 ‘옥순봉 생태공원’은 인적이 뜸한 반면, 조금 아래 ‘옥순봉 출렁다리’는 언제나 붐빈다. 전국 관광지마다 흔한 시설이 됐지만 이 출렁다리는 지난해 10월 개장해 아직까지 ‘신상’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길이 222m 다리를 통과할 때면 후들거리는 발밑으로 초록의 청풍호 물결이 함께 출렁거린다. 입장료 3,000원을 내면 2,000원은 지역상품권으로 되돌려준다.
사실 출렁다리만 가서는 일대의 비경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조금 발품을 팔면 옥순봉과 금수산, 청풍호가 빚은 절경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곳곳에 있다.
비가 온 뒤 죽순처럼 솟아오른 모양이라는 옥순봉의 경치는 오래전 검증이 끝났다. 옥순봉과 이웃한 구담봉은 퇴계 이황과 단원 김홍도 등 예부터 많은 문인과 화가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재직할 때 청풍군수에게 옥순봉을 넘겨 달라고 청했다 거절당하자, 봉우리 하단 석벽에 단양의 관문이라는 의미로 '단구동문(丹丘洞問)’이라 새겼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단원도 연풍현(현 괴산군 연풍면) 현감으로 재직할 때 여러 차례 방문해 옥순봉 절경을 화첩에 담았다. ‘동국여지승람’은 “기묘한 산봉우리들이 조화를 이루어 금강을 방불케 한다”고 극찬했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온전히 돌로 된 수많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어서 마치 거인이 손을 잡고 있는 것 같다"고 묘사했다.
옥순봉의 모습은 출렁다리가 아니라 호수 건너편 가은산 등산로에서 잘 보인다. 옥순봉쉼터 주차장에서 약 5분만 걸으면 전망대가 있다. 지금의 옥순봉은 김홍도의 그림과 차이가 있다. 이황이 새긴 글자도 물속에 잠겨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청풍강이라 불리던 이 구간 남한강은 충주댐이 들어서며 청풍호가 됐다. 옛 모습이 사라진 것은 안타깝지만, 호수는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또 다른 풍경을 빚었다.
옥순봉 꼭대기에 오르면 금수산과 청풍호가 어우러진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등산로는 단양과 경계 지점인 계란재에서 연결된다. 모두가 아는 그 계란이 맞다. 고개 바로 아래에 계란리가 있다. 인근 상천리에 은거하던 토정 이지함이 금수산에 올라 마을을 바라보니 금빛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어서 붙인 지명이라 전한다.
계란재 주차장에서 옥순봉 정상(283m)까지는 2.3㎞, 1시간가량 걸린다. 시작은 비교적 쉬운 길이다. 약 1㎞는 시멘트 포장이 된 임도를 따라 걷는다. 산중의 작은 평원을 지나 짧은 오르막을 오르면 옥순봉·구담봉 삼거리다. 왼쪽이 옥순봉, 오른쪽이 구담봉으로 가는 길이다. 900m 남았다는 이정표에 방심하면 안 된다. 분명 봉우리를 향해 가는데 길은 가파른 내리막이다. 계단도 없어 발길 닿는 대로 길이 갈라졌다 합쳐지고, 바닥에는 나무뿌리와 돌부리가 드러나 있다.
내리막이 끝나면 암반 위로 짧은 오르막이고 바로 옥순봉 정상 표석이 나타난다. 구담봉과 둥지봉 사이 가파른 협곡에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푸른 물이 담겼다. 이따금씩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잔잔한 수면을 가른다.
정상에서 조금 더 가면 또 다른 전망대가 있다. 발아래 출렁다리 위를 지나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인다. 정면으로 옥순대교가 호수를 가로지르고, 그 너머로 푸른 물결이 끝없이 이어진다. 강으로 해석하면 남한강의 도도한 물줄기이고, 호수로 치면 청풍호의 넓은 품이다. 호수 오른편으로는 금수산 줄기가 웅장하게 펼쳐진다. 퇴계와 단원이 이 봉우리에 올랐다 해도 보지 못했을 산과 물의 조화다.
높은 만큼 풍광이 넓어지는 건 당연지사다. 옥순봉에서 볼 때 출렁다리 뒤편 봉우리에 또 하나의 전망대가 있다. 공식 명칭은 ‘청풍호 전망대’다. 출렁다리 건너편 주차장에서 등산로가 나 있다. 제천 걷기여행길인 자드락길 6코스 괴곡성벽길을 따라 걷는다. 실제 성벽은 없다. 마을 입구에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는 괴곡리와 청풍호 사이 산등성이가 성벽처럼 휘어진다.
보드라운 발자국 소리가 연상되는 ‘자드락길’에서 괴곡성벽길은 힘든 코스에 속한다. 입구에서 전망대까지는 약 2.5㎞, 중간쯤 솔숲을 통과하는 평지를 제외하면 내내 오르막이다. 최소 1시간은 걸린다. 중간중간 나타나는 쉼터와 벤치에서 숨을 고른다. “이 길로 올라가야 수월하대유~, 믿어 봐유~” 등 충청도식 유머가 담긴 안내판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전망대는 해발 400m 봉우리에서 나선형으로 3층을 더 오른다. 옥순봉보다 약 120m 높은데 풍광은 그 이상으로 넓다. 산도 호수도 멀리 떨어졌는데 전망은 더 생생하다. 산줄기가 겹쳐져 원근감이 뚜렷하다. 멀어질수록 웅장해 보이는 착시현상이 여행자를 잠시 딴 세상에 내려놓는다.
동쪽으로 까마득한 절벽 아래 옥순대교가 장난감처럼 보이고, 호수 좌우로 바위 절벽이 우람하다. 넓은 물줄기 뒤로 점차 희미해지는 산줄기는 소백산 능선에서 하늘과 맞닿아 있다. 맞은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물줄기는 어느 순간 산줄기와 연결되고, 파노라마로 이어져 월악산 영봉에 닿는다. 전체 풍광은 빙하 침식으로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온 노르웨이의 피오르를 연상시킨다. 충청북도는 충주호(청풍호)를 일러 ‘내륙의 바다’라 부른다. 이 전망대에서 보면 결코 바다가 없는 지자체의 자격지심이나 과장이 아니다.
단양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구간의 남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른다. 청풍호 북측에는 금수산(1,016m)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웅장한 바위 절벽과 기암괴석이 많아 백암산이었는데, 이황이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다는 금수산(錦繡山)으로 바꿔 불렀다 한다. 옥순봉 역시 이황의 작명이다.
수산면 상천리에 용담폭포가 있다. 마을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약 30분을 걸으면 폭포 전망대에 닿는다. 짧은 산행으로 금수산이 어떤 곳인지 조금은 맛볼 수 있다. 마을과 산밭을 통과하면 등산로는 곧장 가파른 암벽에 설치된 수직의 계단을 오른다. 쉬엄쉬엄 숨을 고르며 10분 정도 오르면 오른쪽에 거대한 바위 협곡이 펼쳐진다. 상부에 2개의 푸른 물웅덩이를 만든 물줄기가 곧장 30m 절벽으로 곤두박질친다. 폭포가 빚은 3개 웅덩이는 용이 승천하며 차례로 남긴 발자국에 비유해 상탕·중탕·하탕이라 부른다. 까마득한 하탕은 끝내 제 모습을 보기 어렵다. 내려오는 길에 눈앞에 펼쳐지는 상천마을 풍경이 아늑하다.
용담폭포에서 계속 올라가면 금수산 만덕봉과 연결된다. 금수산은 설렁설렁 다녀올만한 산은 아니다. 이 구간 입산 제한시간은 오후 2시, 11월부터는 오후 1시다. 능선까지 갔다 오려면 최소 5~6시간 걸린다는 계산이다.
인근 능강계곡을 약 2㎞ 거슬러 오르면 정방사라는 사찰이 있다. 원통보전을 비롯한 4개 전각이 벼랑에 매달린 것처럼 아슬아슬한데, 좁은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그만큼 일품이다. 수직으로 떨어지던 산줄기가 서서히 완만해져 청풍호에 닿는다. 멀리 보이는 호수와 주변 농촌마을이 비현실처럼 느껴진다.
‘산속에 무얼 가지고 사냐 하면, 산봉우리 흰 구름 머물러 있고, 다만 스스로 즐거워할 뿐, 그대에게 가져다 드릴 순 없구려’. 유운당(留雲堂) 기둥에 새겨진 오언시가 여행자의 감상을 꿰뚫는다. 정방사까지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 있어서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 주차장에서 약 300m만 걸으면 된다.
정방사 아래 호숫가에 ‘능강솟대문화공간’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역임한 윤영호(77) 관장이 2005년 개관한 솟대 전시관이다. 입구에 ‘ㅎㅁㅅㄷ’ 모양의 장식이 눈에 띈다. ‘희망솟대’의 첫 음소다. 동네 어귀에 높이 세우는 솟대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희망의 상징이다. 윤 작가는 “작은 소망은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지만, 큰 꿈은 하늘이 도와야 가능하다”며 솟대는 하늘을 향한 꿈의 안테나라고 했다.
전시관 앞마당과 호숫가에 그의 작품이 여럿 세워져 있다. 주변에 피어난 억새가 수면에 반사된 햇볕에 눈이 부시다. 차 한 잔 마시며 쉬기 좋은 곳인데, 코로나19 이후 전시관에서는 더 이상 음료를 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