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윤석열 대통령이 유엔총회 기조연설에 나서며 유엔 데뷔 무대를 치렀다. '자유와 연대-전환기 해법의 모색'이라는 주제로 11분간 진행된 연설에서 윤 대통령은 자유, 연대, 책임 등을 키워드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윤 대통령의 연설 특징은 '선택과 집중'이었다. 연설 시간부터 길지 않았다. 통상 각국 정상에게 약 15분의 기조연설 시간이 할당되는 걸 감안하면, 주어진 시간을 다 쓰지 않았다. 대신 본인이 정치 입문 시절부터 늘 강조해온 자유와 연대 이슈에 집중했다. 자유라는 단어만 21번, 연대는 8번, 지원과 책임은 각각 7번이 나왔다.
의아한 건, 북한 이슈를 단 한마디도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 인권의 집단적 유린으로 세계 시민의 자유와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고 안보 위협을 거론하며 북한 이슈를 상기시키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북한을 콕 집어서 얘기한 건 아니다.
대한민국 정상이 한반도 이슈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유엔 무대에서 북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기 5년 내내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한반도 프로세스'를 언급하며 국제사회에 한반도 평화 이슈를 각인시킨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특히 윤 대통령이 유엔 무대 데뷔에 앞서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를 통해 "북한에 집착해왔다"며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했던 터라, '윤석열표 대북정책'의 복안이 무엇인지 궁금증과 기대감은 더 커졌던 상황이다.
그럼에도 '함구'했다. 왜 윤 대통령은 북한의 '북'자도 꺼내지 않았을까.
여야 정치권에서는 윤 대통령의 '침묵'이 계산된 전략이었을 수 있다고 봤다.
북한 이슈는 상대가 있는 정책인 만큼, 북한의 호응을 봐가면서 숨고르기에 나서겠다는 판단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윤석열 정부의 새로운 비핵화 로드맵으로 '담대한 구상'을 제안한 바 있다.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보일 경우 경제적 지원에 돌입하고,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를 이행할 경우 단계별로 정치·군사적 안전보장 방안을 제시한다는 복안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미 "우리는 윤석열 그 인간 자체가 싫다. 우리는 절대로 상대해주지 않을 것"(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명의의 담화)이라며 윤 대통령의 '담대한 구상'을 단칼에 거절한 상태다. 이에 더해 북한은 추석 연휴 직전 선제 핵 공격도 가능하다는 '핵무력 정책 법령'까지 채택해 압박 수위를 높이는 형국이다.
북한 전문가로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캠프에 합류했던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MBC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남측의 대북 제안에 대응할 여건이 안 돼 있고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는 상태에서 굳이 유엔총회장에서 말할 필요는 없다는 전술적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같은 라디오에 출연해 "그냥 북한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자는 게 전략적 판단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는 윤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강하게 비판한 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을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김 교수는 C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의 평화프로세스를 부정해버린 상황에서 유엔 가서 할 말이 있었겠나. '담대한 구상'이 지난 정부의 정책과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고 말이다"라며 "또 전임 정부가 북한에 집착해서 문제라고 해놓고 북한 얘기를 하는 것이 안 맞는 것 같고 하다 보니 준비과정에서 삭제된 것 아닌가 본다"고도 분석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대화의 모멘텀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조언들이 나온다. 윤건영 민주당 의원은 "이번에는 여러 이유로 전략적 판단을 했더라도, (윤석열 정부가) 그 다음 스텝이 무엇인가라는 것은 알고 가야 되는데 그게 안 보여 걱정"이라고 했다.
김종대 교수도 "북한에 뺨 맞았다고 해서, 문제를 자꾸 언급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런 침묵 자체가) 자기중심적이다. (북한의 호응이 없을수록) 인내하고 더 넓은 평화의 비전으로 나갔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