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한복판, 그것도 인파가 붐비는 지하철 역사 안에서 20대 여성이 30대 남성에게 살해되는 충격적 사건이 일어났다. 남성은 여성을 지속적으로 ‘스토킹’하고, 70분 동안 피해자를 기다리는 등 범행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앞서 피해자는 불법촬영과 스토킹을 이유로 가해자를 두 번이나 고소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피해자를 보호할 장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사건은 14일 오후 9시쯤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서 발생했다. 서울교통공사 직원인 범인 A(31)씨는 여자화장실에서 흉기를 휘둘러 여성 역무원 B(28)씨를 살해했다. 경찰은 가해자를 즉시 체포했고, 15일 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 조사 결과, A씨의 범행은 오랜 시간 준비한 명백한 ‘보복 살인’이었다. 그는 당일 지하철 6호선 구산역에서 일회용 승차권을 구입해 탑승한 뒤 신당역으로 이동했다. A씨는 지난 해 불법촬영 혐의로 고소된 뒤 직위해제됐지만 공사 직원 신분은 유지하고 있어 내부망을 통해 B씨가 오후 6시부터 야간근무에 투입된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A씨는 B씨가 나타날 때까지 1시간 10분을 꼬박 기다렸다. 피해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일회용 위생모를 쓰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준비한 흉기를 휘둘렀다.
B씨는 화장실 내 설치된 비상벨로 도움을 요청했고, 역사 직원 2명과 사회복무요원 1명, 시민 1명 등이 A씨를 제압했다. 하지만 심폐소생술을 받으며 병원으로 옮겨진 피해 여성은 오후 11시 31분 결국 숨을 거뒀다. A씨도 경찰 조사에서 “오래 전부터 범행을 계획했다”고 시인했다.
A씨는 피해자에게 앙심을 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두 사람은 원래 2018년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였다. 비극은 A씨가 B씨를 불법 촬영한 뒤 영상 유포를 빌미로 만남을 요구하면서 싹텄다. 참다 못한 피해자는 지난해 10월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촬영물 등 이용 강요) 혐의로 A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B씨를 보호할 제도적 방어막도 삐걱댔다. 당시 서울 서부경찰서는 가해자를 긴급체포하고 구속영장도 신청했지만, 법원은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며 기각했다.
B씨는 경찰에 신변보호 조치를 요청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했다. 경찰은 B씨를 ‘신변보호 112시스템’에 등록한 뒤 1개월 동안 안전조치를 진행했다. 그러나 해당 기간 스마트워치 등은 지급하지 않았다. 기간 종료 후 연장 조치 역시 없었다. 경찰 관계자는 “신변보호 기간 중 특이사항이 없었고, 피해자가 추가 연장을 원하지 않아 종료했다”고 설명했다.
급기야 B씨는 올 1월 A씨를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경찰에 추가 고소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경찰은 이번엔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않았다. 물론 신변보호 조치도 없었다. 검찰은 지난달 18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A씨에게 징역 9년을 구형했고, 1심 선고가 바로 15일 오전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범인은 재판 하루 전 피해자를 무참히 살해한 것이다.
B씨 유족에 따르면 괴롭힘과 협박은 2019년부터 3년 여에 걸쳐 지속됐다고 한다. 특히 불법촬영과 협박으로 첫 번째 고소를 당한 뒤 A씨는 여러 차례 합의를 종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하철 역무원들의 야간근무 체계도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현행 매뉴얼에는 지하철 터널 등 위험 구역은 2인 1조로 순찰하게 돼 있으나, 역내 순찰은 별도의 인원 규정이 없다. 주ㆍ야간 구분 없이 3, 4인이 한 조가 돼 근무하는데 상황실에 2, 3명이 상주하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순찰은 한 명만 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 사건처럼 돌발 상황이 닥치면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유족들은 가해자를 엄벌에 처해 달라고 촉구했다. 유족 측은 “한창 일할 나이에 고인이 너무 황망하게 떠났다”면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경찰 관계자는 “보강 수사를 거쳐 계획범죄를 입증할 단서가 확보되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을 적용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