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앞두고 대검찰청 베테랑 검찰수사관을 만난 적이 있다.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후보가 지지율 급락으로 고전하던 때지만, 그는 윤 후보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경험이 근거였다.
그는 윤 대통령이 말석 검사 시절 ‘피의자 몸에 절대 손대지 말라’고 지시한 기억을 떠올렸다. 구타나 가혹 행위 등 악습이 검찰에 남아 있던 때였다고 한다. 모두가 피하고 싶었던 악역은 주로 ‘한식구’가 아닌 경찰 파견 수사관 몫이었고 말단 검찰수사관부터 상급자 순으로 ‘손에 피를 묻혀야 했다’고 한다. 부장ㆍ차장검사도 아닌 말석 검사의 지시에 반신반의했지만, 윤 대통령은 ‘손댈 일이 있으면 내가 직접 하겠다’는 말로 구태를 걷어냈다고 한다.
단편적 경험을 풀어놓은 건 지난달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이 질의응답을 마치고 퇴장하려다 다시 마이크를 잡던 순간이 떠올라서다.
윤 대통령은 대우조선해양 하청지회 파업 사태를 언급하며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강조했다. 53분간 진행된 기자회견의 8분 가까이를 썼다. 윤 대통령은 “이분들의 임금이나 노동에 대한 보상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노동시장 양극화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고 대안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방향을 제시했다. ‘검찰주의자’라는 세간의 평이 무색하게 “법만 가지곤 해결이 어렵고, 이미 합의된 방식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사회적 합의'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윤 대통령의 정치가 지금껏 국민의힘이 추구해온 방향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당도, 정부도, 대통령실도 이후 침묵했다. 여권에선 이를 윤석열 정권 난맥상의 근본 원인을 보여주는 한 단면으로 꼽는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대통령이 국정 철학을 담은 화두를 던지면, 정부 부처가 정책적 내용을 채우고 당이 입법을 포함한 지원사격에 나서는 등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그런 게 안 된다”며 “대통령 메시지가 허공을 맴돌다 사라지길 반복하다 보니 국정 비전이 뭐냐는 얘기가 나오는 거 아니냐”라고 한탄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7월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당과 화학적으로 결합하기엔 부족한 시간이다. ‘윤핵관’(윤 대통령 측 핵심 관계자)에 이어 초ㆍ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한 ‘신핵관’까지 등장했지만, 여권 내에선 “대통령을 위한 참모가 없다”고 한다. 더욱이 대통령을 위해 참모가 희생되는 일이 다반사인데, 지금은 ‘이준석 전 대표 찍어내기’에 나선 일부 윤핵관을 위해 대통령이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구도까지 만들어졌다.
당내에선 최근 대통령실 개편으로 국정운영 시스템이 안정될 수 있다는 기대가 크지만, 이 전 대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또다시 발목이 잡힐 것이란 우려도 상당하다. 당을 온전히 끌어안지 못한다면 백약이 무효이고, 여당 내홍이 길어지면 민생이 망가진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중진 의원들이 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줄 것을 바라는 이유다.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는 절망적이어도 웃어야 할 때가 있고, 미운 사람도 안아야 할 때가 있다’고들 한다. 말석 검사 시절 보여준 면모라면 '0선'의 윤 대통령이야말로 구태에 찌든 여의도 정치권과 다른 정치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