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겨운 군대 꿈, 더 지겨운 군대 이야기...이제 질문을 넓혀보자

입력
2022.09.17 04:30
12면
<86>"여자는 왜 군대 안 가?"보다 필요한 질문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이한 작가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로서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녀가 함께 고민해 볼 지점, 직장과 학교의 성평등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또 군대 꿈이다.

내무반에서 시작될 때도 있고 훈련소 입소식에 등 떠밀릴 때도 있으며 청천벽력 같은 재입대 통지서에 부들거리며 반박하다 끌려가기도 한다. 디테일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 공포와 무력감 같은 건 대체로 유사하다. 하필이면 생생하기까지 해, '당장 다음 원고 마감은 어떻게 하지?' 하며 식은땀을 흘리다 잠에 깨어 안도하곤 한다. 흔한 이야기다. 어떤 군 생활을 했던, 길었던 짧았던 너 나 할 것 없이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 사이에서 재입대 꿈 한 번 안 꾼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현상을 일종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입대하자마자 제식훈련을 통해 걸음의 손발 각도를 비롯한 모든 행동을 통제받는 경험을 하고, 군대 밖과는 사뭇 다른 규칙과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등, 의지와 무관하게 심신을 구속하는 경험이 외상이 아닐 수 없고, 그로 인한 충격이 꿈에서 반복되는 이 현상을 PTSD라 부르는 것도 영 과장은 아닌 것 같다.

더 지겨운 군대 이야기

그런데 또 한편으로 군대에서 보낸 시간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군대 꿈 못지않게 군대 이야기 역시 지겹게 나온다. '내가 이만큼 힘들게 군 생활을 했다'는 얘기부터 각종 모험담까지, 특히 남성들이 모인 술자리에서는 군대가 없었으면 섭섭했겠다 싶을 정도로 빠짐없이 또 끊임없이 군대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인지 군대 관련 콘텐츠도 계속 생산되고 소비된다. 비판 어린 시선으로 군대를 바라보는 다큐멘터리나 시사 프로그램부터, 군대를 소재로 한 드라마, 영화, 예능, 유튜브 등 군대는 우리 일상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아니 애초에 그럴 수가 없다. 남성의 거의 대부분이 '당연하다는 듯' 군대를 가니까. 그들이 몸과 마음에 익힌 군대 문화가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어리숙한 후임병 혼쭐내준 이야기, 술자리에서 하는 군대 이야기 등 지긋지긋한 군대 이야기가 참 많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갑갑한 군대 얘기는 단연 페미니즘, 성평등을 말할 때마다 나오는 '군대나 다녀오라'는 말이다. 여성이 더 많은 가사노동 부담을 지고 있다는 기사에도, 유리천장과 성별임금격차 문제가 심각하다는 얘기에도, 심지어 여성 대상 폭력을 중단하라고 외치는 목소리에도 군대부터 다녀오라는 댓글이 빠짐없이 달린다. 마치 이 모든 게 여성이 군대에 가지 않아서 발생한 것처럼 말이다. 인터넷 공간뿐만 아니라 교실에서도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강사에게 군대 다녀왔냐고 은근슬쩍 떠보기도 하고, 교육 평가지에 여성차별 못지않게 남성 역시 '군대에 가야 하는 차별'을 겪는데 이를 다루지 않는다며 편향된 교육이라 말하기도 한다.


비명처럼 터져나오는 군대 이야기

어떤 말은 문장 그 자체보다 발화자가 처한 상황과 행간에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군대나 가라는 말 또한 그렇다. 이 비명 같은 외침 아래에는 어떤 공포가 담겨있다. 내가 군대에 가야 한다는 걸 처음 인식한 순간은 유치원 때였다. 유치원 어린이 캠프 같은 프로그램으로 난생처음 경험하는 외박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주변 어른들은 "나중에 군대 가려면 이 정도는 참아야지~"라고 말하며 나를 달래고자 했고, 이는 자연스레 나에게 강인한 남성성에 대한 선망과 함께 군대에 대한 공포까지 심어주었다.

이후에도 군대는 입대 전까지 또래 친구들 사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통일되면 안 갈 수 있지 않을까, 기왕 갈 거면 폼 나게 멋진(힘든) 곳으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누구는 '빽'이 있어서 편한 곳에 갔네, 누구는 군대에서 다쳐서 '개고생'했다더라 등 복잡하게 터져 나오는 군대 이야기는 단지 투정으로 치부되거나 남 탓으로 해결될 수 없는 공포와 차별, 폭력 문제가 섞여 있었다.

하나 비극은 이런 얘기가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에게는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리어 세상의 수많은 예비군은 앳된 남자들의 호소에 그저 "사내새끼들이 말이야…"로 일장연설을 시작하고 '나 때'를 소환하며, 하소연하는 이들의 문제를 터부시한다. 마치 성차별 문제에 군대나 다녀오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이렇게 폭력은 진공에서 발생하지 않고 늘 더 약한 곳으로 대물림된다.

군대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

군대나 다녀오라는 냉소 섞인 말은 그 누구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이 공허할 뿐이다. 우리에게는 그 이상의 이야기가, 더 나은 질문이 필요하다. 애초 남성만 징병하는 이유가 뭘까? 어떻게 그렇게 된 걸까? 과거 어둠의 페미니스트가 암약하여 남성을 골탕 먹인 게 아니라면 그 역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성별 고정관념과 성차별에 기인했을 것이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실로 남성 징병은 남성이 더 우월한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고 여성은 보호받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성별고정관념에 기인한 성차별이다. 같은 맥락의 성차별 아래, 여성은 정치, 경제, 사회, 역사에서 지워졌고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 역시 일상적으로 여기거나 어쩔 수 없다는 듯 무시당했다. 다시 말해, 군대 문제와 성평등은 반목할 게 아니라 도리어 함께 가야 할 문제다.

한편으로 한물간 '군 가산점제'를 여전히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징병'이라는 협소한 상상력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그 군 가산점제를 도입하면 정말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될까? 결코 그렇지 않다. 군 가산점은 군대에 다녀왔더라도 공무원이나 공기업에 다니는 극히 일부에게만 간신히 혜택이 되기에 당장 나에게는 고스톱 점수로도 쓸 수 없는, 있으나 마나 한 제도다. 그에 반해 폐해는 크다. 군 가산점은 사기업의 채용 성차별과 성별임금격차, 유리천장 등 경제영역에서 열악한 상황에 내몰린 여성들에게 그나마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였던 공무원, 공기업이라는 자리마저 앗아갔다.

한마디로 보상은 미미하나 차별은 광범위하고 영구적이다. 이런 차별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군 가산점제는 이미 1999년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전원이 위헌으로 판단한 바 있다. 아니, 애초에 이상하다. 고생은 군대에서 했는데, 왜 그 보상을 민간에서 받아야 하며 그로 인한 차별은 징병되지도 못한 여성들이 이중으로 겪어야 하는가?

서로를 탓하는 소모적 논쟁보다 더 나은 질문은 없을까? 예컨대 나는 군대에서 유난히 낭비한 적도 없는데 휴가 때 친구를 만나다 보면 금방 통장 잔고가 바닥나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했다. 이런 비참한 마음을 나중 말고 즉각적으로, 개개인이 알아서 말고 날 데려간 군대가 '현실적인 임금'으로 해결해 줄 수는 없을까? 일과 후 외출은 왜 불가능할까? 카투사는 가능하다던데 뭐가 그렇게 다를까? 혹시 불가능한 게 아니라 귀찮거나 번거로운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게 번거롭고 귀찮은 사람은 대체 누굴까? 아니 애초에 징병이 꼭 필요할까? 여전히 '휴전'이라 어쩔 수 없다면, 그 휴식 중인 전쟁을 끝낼 수는 없는 걸까?

혹자는 이런 물음들에 대해 사상이 불순하다고, 군대와 사회는 다르다고, 군의 특수성을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떠들지 말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도 물어보자. 군대와 사회는 어떻게 다른가? 그렇다면 군대에 대해 떠들어댈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그런 질문을 막아버리는 게 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함인가?

페미니스트와 함께 군대를 이야기하자

질문에 능통한 사람들이 있다.

수많은 페미니스트가 여성과 남성이 그렇게 다른지 질문해왔다. 그 말은 여성이 연약하고 보호받는 대상에 그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자, 동시에 남성들로 하여금 징병이라는 억압된 경험과 공포를 말하고 더 나은 변화를 요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요즘 군대가 무슨 군대냐고 비아냥거리며 자신의 경험을 축소하거나 낭만화하지 말고 직면해서 바라보자. 그게 정당했는가? 정말로 필요한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후세대에 마땅히 대물림할 수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이야기하자. 힘들었다고 괴롭고 두려웠다고,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자. 징병되지 못한 존재를 향해서가 아니라, 징병하는 이들을 향해서 외치자. 변화를 말하자. 장담컨대, 폭력과 차별에 대한 변화를 이야기하는데 페미니스트만큼 든든한 동료가 또 없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주저 말고, 이제 함께 군대를 이야기하자.

이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