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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의 연단에 오른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들이 저급할 때, 우리는 품격 있게 간다(When they go low, we go high)."
역사적 명연설로 기억되는 이 자리에서 미셸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성폭행 시도 자랑 영상'을 맹폭합니다. 힐러리 그리고 미셸,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여성의 '성차별주의자'인 중년 백인 남성 기득권 후보를 향한 협공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2주 전 '세상의 관점'에서 소개한 실화 바탕의 미국 드라마 '퍼스트 레이디(The First Lady)'는 이 순간에 얽힌 뒷이야기를 맨 위의 대사처럼 아름답게 그리지만은 않습니다. 힐러리의 지원 요청에도 머뭇거리는 미셸의 모습에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트럼프가 이기면 힘들어지는 건 '백인 여성'뿐만이 아닐 거다." 흑인 여성 미셸을 움직인 한마디입니다.
물론 이는 드라마 속 가공된 대사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페미니즘과 여성을 둘러싼 다양한 현실을 반영합니다. 그간 여성 운동과 페미니즘은 '모든 여성은 자본주의와 결합한 가부장제 아래에서 착취와 억압을 당하고 있다'고 바라봤는데, 과연 모든 여성이 놓인 처지가 균일하고 동등한 걸까요. 여성 안에서도 계급, 인종에 따라 위치가 다 다르고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는 목소리가 있기 마련일 겁니다.
'저항의 아이콘' 흑인 여성 운동가 앤절라 데이비스가 1981년 쓴 이 책 '여성, 인종, 계급'은 남성 중심으로 전개된 '흑인 인권 운동'과 백인 여성 중심으로 펼쳐진 '여성 인권 운동'에서 흑인 여성이 각각 어떻게 배제되었는지 고찰합니다. "여성이 흑인, 노예, 가난한 사람일 때 여성성의 기준과 페미니즘 이론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라는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의 해제가 두꺼운 책의 핵심을 관통합니다.
일례로 1970년대 미국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로 대 웨이드 재판'을 둘러싸고 '임신중지권'이라는 폭발적 캠페인에 몰두했습니다. 이는 '여성의 주체적 선택'을 강조하는 중간계급 백인 운동가들에게 특히 주효한 이슈였습니다. 물론 당시 불법 임신중지수술로 인한 사망자 대부분은 흑인과 푸에르토리코인 등 유색인종 여성이었지만, 과연 출산 통제라는 고상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오히려 경제적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까웠을 겁니다.
개인의 정체성은 단일하지 않습니다. 계급과 인종, 지역, 종교, 연령, 성정체성 등 여러 사회 요소가 결합하고 작용해 개인의 정체성을 이룹니다. 이 책은 이 같은 '상호교차성' 개념을 설명하는 초기 '교차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꼽힙니다.
"여성들 간의 차이는 개별 인구수만큼이나 다양하고, 이 다양성은 단지 '다름'이 아니라 억압과 피억압 관계에 있다. 방위산업체에 근무하는 미국 여성과, 미국의 패권주의와 군사주의에 착취당하는 대다수 국가 여성의 이해관계는 다르다. (해제)" 한국은 미국에 비해 인종 차이가 크지 않지만, 1980년대 미국에서 집필된 이 책은 오늘날 한국 페미니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지금 어떤 여성의 목소리가 덜 들리고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