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뜬 근년의 '군주'들

입력
2022.09.1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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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 히로히토 일왕 토혈

일본 히로히토 일왕이 1988년 9월 19일 밤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다음 날 궁내청은 ‘일왕 폐하의 용체가 급변’을 맞이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총리는 각료들에게 도쿄를 떠나지 말라고 지시했고, 일본 언론들은 일왕의 병세를 속보 형식으로 전하며 국민의 자숙을 당부하는 사설 등을 게재했다. 1926년 왕위에 올라 64년 동안 재위한, 제2차 세계대전 제국헌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군주이자 신이었던 존재의 추락이었다. 도쿄 가을 축제(마쓰리) 등 행사와 공연들이 잇달아 취소되는 등 일본 전역이 자숙의 기운으로 침잠했다는 보도들도 이어졌다. 하지만 20일 도쿄 증시는 요동쳤다. 연호 변경이 임박해지면서 달력과 공문서 등의 인쇄 수요를 기대한 종이 펄프 잉크 인쇄 관련 주들이 폭등했고, 거래가 13차례나 일시 중단됐다.

한 해 전 9월 만성 췌장염으로 공식 발표된 병증으로 수술을 받은 바 있던 히로히토 일왕은 토혈과 수혈을 반복하다 1989년 1월 별세했다. 사인은 십이지장암이었다. ‘인간 선언(신성 포기)’ 이전의 일왕을 기억하며 일왕의 거처인 ‘황거’에 운집해 있던 노인들이 대성통곡하기도 했다. 유사한 일이 1979년 10·26 사태 직후 한국에서, 초중등 학생들 사이에서도 빚어졌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부고에 대한 영국 및 영연방 시민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조선시대 국장(國葬), 즉 왕과 왕비의 장례는 60단계가 넘는 절차 속에 만 3년에 걸쳐 진행됐다. 국상 시 벼슬아치와 백성이 지켜야 할 규칙을 정한 ‘계령(戒令)’에 따르면, 병조가 먼저 중요한 곳을 숙위(宿衛)하는 일종의 계엄령이 선포됐고, 중앙·지방 관료들의 사적 일상까지 촘촘히 개편됐다. 시신은 약 닷새 뒤 90겹의 수의를 두른 채 입관됐고, 왕릉에 묻히기까지 또 3~5개월이 소요됐다. 백성도 일정 기간 소복을 입어야 했고, 약 3개월간 시장도 서지 못했고, 음악도 혼인도 도살도 금지됐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