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서거 이후 '영국연방(영연방·Commonwealth)' 국가를 중심으로 제국주의 유산과 작별을 고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70년 넘게 구심점 역할을 해 온 여왕의 부재를 계기로 ‘군주제 폐지’에 불이 붙은 까닭이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풍요를 누린 데는 식민 착취의 쓰린 역사가 있던 만큼, 반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나라 안에서도 스코틀랜드 등이 또다시 분리 독립에 나설 가능성이 커지면서 ‘내부 결속력’이 새로 취임한 찰스 3세의 난제가 될 전망이다.
11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을 종합하면, 영연방 안팎에서는 ‘군주제 회의론’이 커지고 있다. 영연방은 영국과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독립국 56개국으로 구성된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다. 지금까지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인정하는 나라도 14개국(영국 제외)에 달한다.
몇몇 국가는 발 빠르게 영국과의 결별 의지를 드러냈다. 카리브해 섬나라 ‘앤티카 바부다’의 개스턴 브라운 총리는 전날 3년 내 군주제 폐지 관련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나라는 영국 국왕이 국가 수장을 맡고 있는데, 실질적 독립에 나서겠다는 의미다.
영국 여왕이 명목상 국가 원수인 호주에서도 탈(脫)군주제 논쟁에 불이 붙었다. 연방의회 제3당인 녹색당의 애덤 밴트 대표는 엘리자베스 2세 서거 이튿날 “호주는 앞으로 나아가 공화국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가 “지금은 여왕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해야 할 때”라며 선을 그었지만, 정치권 내에서는 이번 기회에 해묵은 과제인 ‘공화국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연일 높아지고 있다.
변화의 바람이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작년 11월 카리브해 섬나라 바베이도스의 영연방 탈출을 시작으로, 군주제에서 탈피해 공화제를 택하려는 움직임은 자메이카, 바하마, 밸리즈 등 이웃 국가로도 옮겨붙은 상태다. 3월 윌리엄 영국 왕세자 부부가 이들 3국을 방문했다가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과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직면하기도 했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식민주의 잿더미에서 태어난 영연방 국가들이 엘리자베스 2세 서거 후 새 방향을 찾게 됐다”고 분석했다.
영국 여왕의 서거를 반기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수세기 영국 식민지였던 아일랜드가 대표적이다. 엘리자베스 2세 서거 소식이 알려진 8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 경기장에서는 여왕 사망을 조롱하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온라인상에서는 아일랜드인들이 도로 위에서 경적을 울리거나 깃발을 흔들며 마치 축제를 즐기는 듯한 영상도 잇따랐다.
이는 아일랜드의 반영(反英) 감정 때문으로 풀이된다. 아일랜드는 1171년 헨리 2세의 침공 이후 800년간 영국 식민지로 수탈당했다. 19세기에는 영국의 외면 속에 100만 명 이상 굶어 죽은 대기근까지 겪어야 했다. 엘리자베스 2세가 2011년 아일랜드를 찾아 ‘고통받은 모든 이들에게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언급했지만 뿌리 깊은 악연은 쉽게 해소되지 않은 셈이다.
잉글랜드·웨일스와 더불어 ‘연합왕국(United Kingdom)’을 이루고 있는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조만간 스코틀랜드 다수당인 스코틀랜드민족당(SNP)이 2014년 부결됐던 독립 관련 주민 투표를 다시 추진할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북아일랜드에서도 제1당인 신페인당이 영국 독립 및 아일랜드와의 통합을 가속할 조짐이다.
아프리카에서도 식민주의 등 영국의 어두운 과거를 비판하며 추모를 거부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 케냐 변호사는 AP통신에 “나는 (여왕을) 애도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한 1952년 영국이 케냐 독립운동 조직을 잔혹하게 진압한 점을 저격한 것이다. 당시 10만 명 이상 케냐인이 열악한 환경의 수용소에서 고문과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야당 역시 여왕이 식민 지배 잔혹 행위를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은 만큼 애도를 표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마야 자사노프 미 하버드대 교수는 NYT 기고문에서 “여왕이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그의 존재는 피비린내 나는 영국 제국주의 역사를 희석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