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유럽연합(EU)으로부터 제재를 당한 러시아인 기업가는 7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이렇게 말했다. 서방은 러시아 재벌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게 해 푸틴의 돈줄을 끊을 목적으로 제재를 가했다. 그러나 서방의 기대는 엇나갔다. 재벌들이 미적대고 있는 것. 왜일까.
러시아 재벌들은 전쟁 초기 정치인들과 함께 가장 먼저 제재 대상에 올랐다. △미국 등 서방 은행 계좌 동결 △서방 기업 지분 강제 처분 △요트·저택 같은 재산 압류 등 제재 목록이 계속해서 추가되고 있다. 지난 5월 말 기준 EU는 러시아 재벌 재산 100억 유로(약 13조8,000억 원)를, 미국은 6월 말 기준 300억 달러(약 41조4,000억 원)를 동결했다.
FT가 인터뷰한 7명의 러시아 재벌은 "우리는 '통제 밖의 일' 때문에 희생됐다"고 호소했다. 서방의 기대와 달리 푸틴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이다. 옛 소련 붕괴 후 출현한 1세대 재벌이 정계와 유착했던 것과 달리, 지금의 2세대 재벌에겐 정치권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2000년 집권한 푸틴 대통령은 "권력에 복종하면 재산은 유지하게 해주겠다"고 경고한 후 홀로 권력을 쌓아왔다.
마이클 맥파울 전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는 "부자가 푸틴과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푸틴과 가까운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이라며 "(민간 부자들은) 푸틴에게 영향력이 전혀 없다"고 평가했다.
러시아 재벌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개다. 전쟁을 비판하고 러시아를 떠나거나, 독재 정권의 품으로 투항하는 것이다. FT에 따르면 재벌 다수가 전쟁에 반대하지만 보복이 두려워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올해 4월 러시아 최대 디지털은행 '틴코프뱅크' 설립자 올레그 틴코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미친 전쟁"이라고 비난한 지 하루 만에 "은행 운영에서 손 떼지 않으면 국영화하겠다"는 정부 협박을 받고 은행 주식을 급처분했다.
배신의 대가는 경제적 손실로만 끝나지 않는다. 푸틴 대통령은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인사는 누구든 제거해왔다. 전쟁 전에도 '정적'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와 알렉세이 나발니, 알렉산더 리트비넨코 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 등을 암살 시도했다. 전쟁 이후엔 에너지 기업인들의 의문사가 잇따르고 있다. 모스크바 병원에서 추락사한 석유기업 루크오일의 라빌 마가노프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총 8명이 올해 들어 사망했다.
몇몇 재벌은 우크라이나에 돈을 주고 몰래 제재를 해제 받는 '제3의 방법'을 시도했지만, 이것도 실패했다. "제재는 흥정 대상이 아니라 원칙의 문제"라는 게 우크라이나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FT는 재벌들이 "독살당할까 두려워하면서 이제껏 쌓은 부와 명성을 잃는 것도 걱정한다"며 "어떻게 할지 완전히 길을 잃은 상태"라고 전했다. 한 러시아 기업인은 "몇몇은 '(제재를 계속 당하느니) 차라리 자유롭게 음식점을 돌아다니고 행복할 수 있는 모스크바로 돌아가겠다'고 한다"며 "제재가 크렘린궁과 거리를 두던 엘리트들을 오히려 그쪽으로 몰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