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소재 한 사진관. 백발의 노인은 '인생 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그를 반긴 사진사는 차인표. 추석을 앞두고 주변 이웃들의 희로애락을 포착하기 위해 29일부터 이틀 동안 사진관을 열었다. 그는 아날로그 카메라의 사용법 등을 배운 뒤 카메라가 손에 익을 때쯤 '종로사진관'이란 간판을 길가에 내고 영업을 시작했다. 종로는 그가 태어난 동네다.
차인표의 사진관을 찾은 백발의 노인은 벨기에에서 나고 자란 배현정(본명 마리 헬렌 브라쇠르) 전진상의원 원장이다. 가톨릭 평신도 선교봉사단체인 국제가톨릭형제회 회원인 그는 평생 봉사를 결심한 뒤 1972년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빈곤과 질병의 악순환에 허덕이던 한국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1975년 시흥동 판자촌에 무료 진료소를 열었다. 벨기에에서 간호사였던 그는 의술로 어려운 이웃을 더 돕기 위해 의대로 편입, 1980년대 중반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그렇게 흰 가운을 입은 배 원장은 여느 의사와 진찰 방법이 확연히 달랐다. 그는 초진 환자를 받으면 가계도부터 그렸다. 환자의 경제적 여건을 알아야 질병의 근본을 알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한국 이름 배현정은 어떻게 지으신 거예요?" 차인표는 배 원장이 털어놓은 삶의 이야기를 먼저 경청한 뒤 사진을 찍었다. 찾아온 손님의 삶을 먼저 이해하고 그에 맞는 사진을 찍자는 게 사진사 차인표의 욕심이었다.
이렇게 차인표는 외로운 죽음을 돌보는 강봉희 장례지도사와 제주 바다를 청소하는 변수빈 다이버 등을 사진관에서 만나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차인표가 찍은 사진과 그 사진에 담긴 이웃들의 따뜻한 삶은 10일과 11일 오후 8시 이틀에 걸쳐 '종로사진관'이란 이름으로 KBS1에서 방송된다.
혼자 빛나야 주목받는 게 연예인의 숙명이다. 그런 차인표는 왜 남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잡았을까. 지인과 '종로사진관' 제작진의 말을 종합하면, 타인의 삶에 대한 차인표의 관심은 진심이다. 그는 말없이 몸으로 웃기는 비언어극으로 유명한 퍼포먼스팀 옹알스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2019년 연출했다. 두 딸을 입양한 그에게 더불어 사는 삶은 인생의 화두다. '종로사진관'의 윤선영 PD는 "사진관에 들른 분 중에 어린 자녀와 함께 가족 촬영을 한 분도 있는데 그때 차인표가 아이들을 친밀하게 잘 이끌어 '아, 아빠구나'란 생각이 새삼 들었다"고 말했다. 그런 차인표의 실제 휴대폰 사진첩엔 두 딸의 사진과 밭에 쭈그려 앉아 농사를 짓는 어머니의 사진 등으로 절반 이상이 채워져 있다.
차인표에게 사진사 도전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삶의 여정이다. SBS 예능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 사부로 출연한 그는 일과표에 '라이트 나우'(Right Now) 시간대를 그려 넣었다. 하지 못한 말과 일 그리고 만나고 싶은데 만나지 못한 사람을 돌이켜보는 시간이다. 차인표는 2013년 이후 인생의 나침반을 '라이트 나우'로 잡았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동생을 그해 떠나보낸 그가 돌연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고 소설('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2021)을 쓰더니 이번엔 사진사로 도전하게 된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