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이 없어. 죽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5일 오전에 찾은 서울 관악구 조원동 반지하 주민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달 집중호우 피해로 구청이 지원하는 이재민 대피소 운영과 숙소비 지급이 지난달 30일에 끝난 탓에 이들은 아직 복구되지 않은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대급 태풍 ‘힌남노’ 상륙 소식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비와 다시 싸워야 한다.
딸과 두 손녀와 함께 사는 70대 남성 A씨는 요즘 장판을 들어낸 콘크리트 바닥에 스티로폼 깔개를 놓고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 8일 밤을 잊지 못한다. 오후 11시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물이 찬 집 안에서 딸과 7세, 11세 손녀가 창문을 열고 살려달라고 소리지르고 있었다. 주민들이 도와줘 겨우 창살을 뜯어내고 가족을 구했지만, 크게 놀란 큰 손녀는 이후로 비만 오면 “무섭다”고 몸서리를 친다. A씨는 “갈 곳이 없어 태풍이 와도 또 당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인근 빌라 반지하 거주민 조동춘(75)씨 집도 열린 창문을 통해 금방이라도 빗물이 들이칠 것 같았다. 조씨는 “물이 계속 새어 들어오니 도배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면서 “구청이 제공한 모텔 지원도 끊겨 그저 버티는 게 최선”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그간 망가진 집을 복구하는 데 속도를 내던 주민들은 손을 놔버렸다. 김동주(78)씨가 집안 장판을 들어 보이자 이미 바닥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벽에 페인트칠을 하는 등 겨우 수습 중이었는데, 다시 폭우가 쏟아지니 막막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1만7,000여 개를 배치했다고 홍보한 모래주머니로 침수에 대비한 가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래주머니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관악구 관계자는 “모래주머니는 직접 주민센터에서 수령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곧 공지 문자를 발송하겠다”고 말했다. 구에서 보급한 물막이판 역시 대부분 떼어둔 상태였다. 한 주민은 “물막이판 높이가 낮아 폭우가 쏟아지면 물이 다 넘어온다. 무용지물”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주민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건 이뿐이 아니다. 일부 세입자는 “재난지원금을 나눠달라”는 집주인 등쌀에 시달리고 있다. ‘실 거주자가 수리를 하지 않고 거주할 경우’ 세입자가 동의하면 정부가 지급할 재난지원금 200만 원의 절반을 소유자와 나눠가질 수 있다는 규정 때문이다. 황모(49)씨는 “13년째 사는 반지하 방 집주인이 동의서를 써달라고 연락이 왔다”고 했다. 그는 전세금 6,000만 원을 떼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동의서를 쓰기로 했으나, “더 큰 피해를 입은 세입자가 왜 집주인에게 지원금 절반을 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국의 지원금이 바로 지급되는 것도 아니다. 김동주씨는 “구청의 숙박비 지원 약속을 믿고 2주간 모텔에 머물며 70만 원을 지불했지만, 아직 연락이 없다”고 말했다. 정부 재난지원금도 감감무소식이다. 관악구 관계자는 “재난지원금은 추석 전에, 숙박비도 최대한 빨리 지급할 수 있게 준비하고 있다”면서 “이재민 대피소도 침수 상황이 발생하면 운영을 재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