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에서 군사독재 시절 제정된 현행 헌법을 갈아치우려는 시도가 무산됐다. 개헌 취지에는 국민 다수가 공감했지만, 개헌안에 담긴 내용이 너무 추상적인 데다, 여론 수렴 없이 급격한 사회 변화를 추구해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칠레 정부는 개헌 절차를 다시 밟을 것으로 보인다.
칠레 선거관리국은 4일(현지시간) 개헌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결과(개표율 99.0%) 찬성 38.1%, 반대 61.9%로 부결됐다고 밝혔다. 개헌을 위해선 절반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이번 개헌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 정권 시절인 1980년 만들어진 현행 헌법을 뜯어고치려는 시도였다. 2019년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계기가 됐다. 사회 전반의 불평등을 뿌리 뽑고자 하는 시민의 열망은 개헌 요구로 모아졌다. 개헌 절차 착수 여부를 묻는 2020년 국민투표에서는 78%가 새 헌법 제정에 찬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개헌안이 마련되자 부정적 기류가 확산됐다. △원주민 자치권 확대 △임신중지권 합법화 △공기업 구성원 남녀 동수 등 급격한 사회 변화를 초래할 진보적 가치가 개헌안에 담긴 것이 주원인이었다.
당장 기득권층과 보수언론들이 "좌편향한 개헌안"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칠레 인구의 약 13%를 차지하는 11개 원주민 집단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조항은 특히 거센 반대에 부닥쳤다.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충분한 여론 수렴 없이 급격한 사회 변화를 강제한다"며 반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뉴욕타임스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보수적인 국가를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 사회로 만들려는 개헌안은 너무 극단적이었다는 게 칠레 국민의 판단"이라고 분석했다.
제헌의회 구성원의 3분의 2가 진보적 성향 인사로 꾸려지면서 기존 보수정당은 개헌 논의에서 배제된 것도 꼬투리가 잡혔다. 중도좌파인 리카르도 라고스 전 칠레 대통령은 "개헌안이 극히 당파적"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개헌에 찬성했던 보험판매원인 마리아 유지니아 뮤즈(57)씨는 "최종안은 칠레의, 칠레 국민의 헌법이 아니다. 그것은 한 집단의 헌법"이라고 주장했다.
개헌안 부결로 지난 3월 취임한 가브리엘 보리치(36) 칠레 대통령은 리더십에 치명타를 입게 됐다. 그는 개헌 추진 동력으로 사회 전반에서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일보 후퇴가 불가피해졌다. 전 세계를 덮친 인플레이션 여파 등으로 30% 밑으로 급락한 지지율도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럼에도 보리치 대통령은 개헌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국민투표 개표 이후 발표한 대국민 담화에서 "오늘 결정은 우리 정치인들이 더 많이 대화하고 하나로 단결할 수 있는 제안에 도달할 때까지 더 열심히 일할 것을 요구한다는 뜻"이라며 "의회, 시민사회와 함께 새로운 일정을 수립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고 약속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