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중심 사고 넘어 인간 너머의 사고로

입력
2022.09.0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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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영상물이나 문학에서 근미래를 다룬 SF물이 중요한 트렌드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연극에서는 근래 들어 조금씩 미래 사회에 관심을 보이는 작품이 등장하고 있다. 아직은 새로운 서사를 개발하기보다는 김보영의 동명 소설을 옮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처럼 기존 SF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들이 호응을 얻는 분위기다. 연극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이하 'A.I.R')은 연극계에서 움트기 시작한 근미래를 다룬 순수 창작극으로 관심을 모았다.

연극 장르에서 근미래를 잘 다루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래 세계를 관객의 눈앞에서 보여 줘야 하는 어려움 때문일 것이다. 영상물과 문학은 장르적 문법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미래 세계를 표현할 수 있지만 연극은 직접적으로 무대에 재현해야 한다. 'A.I.R'에서도 그러한 부담감이 느껴진다. 작품은 등장인물을 디오라마(실사모형) 배경에 레고로 표현한 영상을 무대 스크린에 송출해 실제 등장인물들과 병치시킨다. 무대에 재현된 인물들을 새로운 차원으로 보게 만들기 위한 연출이다. 레고가 미래적 느낌을 주진 않지만 게임 속 세상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연극적 상상력으로 새로운 시대를 경험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때는 2060년경 근미래, 세계는 인공지능로봇(AIR)의 통제로 국가 시스템이 잘 운영되는 1·2구역과 인공지능(AI)과의 교류를 가급적 피하고 자연 상태의 삶을 꿈꾸는 지역 '네크', 그리고 자연의 재해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3구역으로 나뉜다.

동물어 학습용으로 개발된 AI 지니는 우연히 자의식을 갖게 된다. 1구역의 이나는 반려동물로 키우던 아프리카회색앵무 바(BA)가 생태교란종으로 지정되면서 1구역에서 키울 수 없게 되자 네크로 이동한다. 하지만 팬데믹이 점차 심해지자 네크에서도 BA를 키우지 못하고 빼앗긴다. 이나는 국가의 관리를 거부하고 자연 상태에 무방비로 노출된 3구역으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자의식을 가진 AI 지니를 만난다.

'AI가 자의식이 생긴다면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의 가장 고등한 감정인 사랑을 하는 자의식이 있는 AI, 이는 새로운 종의 인간 창조와 다르지 않다. 작품은 도전적 질문을 던지고 극을 전개하지만 극은 AI의 사랑 여부보다는 이들의 사랑을 통해 사랑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작가이자 연출가인 장우재는 이 작품의 목적이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인간 너머'의 관점에 다가가는 일"이라고 했다. 인간을 닮게 만든 AI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지니와의 소통을 통해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나 조금 더 열린 차원에서 세계를 바라보게 한 것이다. 반려앵무 BA를 등장시켜 로봇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새로운 관계 맺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사고는 유의미하고 점점 더 필요하겠지만, 인간이 인간의 사고를 넘어서 인간 너머의 인식에 다다를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인간이 AI와 동물 등 타자와 소통하는 이 작품에서 흥미를 느끼는 지점은 기존 인간 중심의 사고를 넘어선 새로운 인식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다. AI 지니가 '도와준다'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동물언어번역용 AI 지니가 새들의 말에는 주어가 없다고 말할 때, 그리고 지니와 이나가 마음을 열고 서로를 사랑으로 받아들일 때, 인간이 아닌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새로운 인간 너머의 관점을 갖게 되기보다는 지극히 인간적 관점에서 인간에 대한 깨달음이 넓어진다.

연극 'A.I.R'는 이미 가까이 다가와 있는 미래에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될 AI와의 공존을 화두로 던진다. 작품에서 설정한 가상 세계가 복잡하고 그것을 숙지하면서 극을 따라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연극 'A.I.R'는 이 같은 어려움을 충분히 감내할 만큼 매우 중요한 화두를 다루고 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기계화되고 인간 이외의 타자와의 교류가 긴밀해질수록 동물을 넘어 로봇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은 점점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질문일 것이다.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