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동맹의 부메랑

입력
2022.08.31 18:00
26면
윤석열 정부 출범 후 한미 경제 밀월
미 반도체법·인플레 감축법에 당혹감
이익 앞엔 동맹도 희생양 될 수 있어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한미는 경제적 밀월 관계에 들어선 듯했다. 주는 쪽은 한국이었다. 윤 대통령 취임 열흘 만에 방한한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가입을 약속했고 최근엔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일명 '칩4') 동참 요청에 응했다. 이 과정에서 두 협의체가 중국을 배제한 미국의 공급망 재편 책략이라는 중국의 질시도 감수했다. 대기업들은 바이든 방한 전후로 현대차가 조지아주 전기차 공장 건설에 7조 원대, 삼성·SK·LG 배터리 3사가 현지 공장 설립에 총 17조 원대 투자 계획을 밝혔다. 지난해 5월 문재인 대통령 방미 때 44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공언한 지 1년 만에 재차 선물 보따리를 안긴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들려온 소식은 '보답'과는 거리가 멀다. 바이든 대통령이 8월 9일과 16일 각각 서명한 반도체 지원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얘기다.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세액 공제(25%)를 적용, 국내 양대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수혜가 예상됐던 반도체 지원법엔 초안에 없던 단서 조항이 들어갔다. 세제 혜택을 받은 기업은 10년간 중국을 비롯한 '우려 대상국'에 반도체 관련 신규 투자를 금지한다는 내용으로, 중국에 대형 생산기지를 둔 국내 두 기업은 사실상 수혜 대상에서 배제된다.

IRA는 전기차 보조금(신차 최대 7,500달러)을 북미에서 조립된 제품에만 주고, 내년 이후엔 북미산 부품과 미국·동맹국산 광물이 일정 비율 이상 들어간 배터리까지 장착해야 주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현재 전기차 전량을 한국에서 생산하고 있는 현대차, 배터리 원료를 중국에 의존하는 국내 배터리 3사는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고도 혜택은 당장에도 나중에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해외 기업을 차별하는 이들 법안을 두고 한국, 유럽연합(EU) 등은 세계무역기구(WTO) 규정 위반이라며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항의엔 반(反)중국 경제안보를 명분으로 동맹국과의 공조를 강조했던 미국에 대한 배신감도 서려 있다. 추가 경고도 나온다. 두 미국 법안이 자국의 제조업 부흥이라는 로드맵에 기반하고 있어 실행 과정에서 한국과 같은 동맹국도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계에선 미국이 IRA에서 전기차 배터리 소재를 보조금 지급과 연계한 것은 중국을 배제하고 배터리 표준을 수립하려는 포석으로 본다. 중국이 공급을 장악한 광물 위주인 니켈·코발트·망간(NCM)배터리 대신 흔한 광물로 이뤄진 리튬인산철(LFP)배터리를 중심으로 세계 전기차 시장을 재편하려 한다는 것이다. NCM배터리를 주력으로 하는 한국에는 심각한 얘기다. 미국의 구상과 보조를 맞추려면 그간 축적해온 기술력과 생산기반을 포기해야 할 판이다. 반도체 지원법에서도 미국의 관심사가 한국의 주종목인 메모리 반도체가 아니라 시스템 반도체 생산시설 유치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 우리 역시 미래 성장 동력으로 여기고 있는 시스템 반도체 투자로 미국 좋은 일만 시키고, 중국 내 생산 비중이 높은 메모리 반도체는 타격을 입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국회와 정부, 업계가 앞다퉈 방미 대표단을 꾸려 미국 정부와 의회에 IRA 시정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당장 결과를 낙관하긴 힘들다. 11월 중간선거에 사활이 걸린 미국 양당이 국민 일자리를 늘리는 법안에 손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지부진하던 지지율을 40%대 중반으로 끌어올리기까지 했다. 동맹은 중요하지만 국익까지 덜컥 내맡길 일은 아니다. 실무선에서 해결이 안 되면 윤 대통령이 9월 유엔 총회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만나 타개책을 찾을 필요가 있다.

이훈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