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려인의 '만남'

입력
2022.08.2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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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다'를 말하지 않는 날이 있을까? '만나다'는 가다, 하다, 있다 등과 함께 사용 빈도가 높은 말이다. 우선 '만나서 반갑습니다', '내일 만나요, 또 만나요' 등 인사에서 빠질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 언제 한번 만나요'처럼 안부를 묻고 친목을 다지는 주요 표현이다. 공공시설과 체험 공간 등지에는 이름하여 '만남의 광장'이 꼭 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는 노랫말처럼 만남에는 강조 표현도 다채롭다. 좋은 만남, 아름다운 만남, 우연한 만남, 잘못된 만남, 운명적 만남, 첫 만남 등 만남은 무수한 말과도 잘 어울린다. '만남'은 누군가의 인생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의 제목도 되고, 드라마와 영화의 주제도 된다. 만남이란 곧 삶의 일부가 아닐까?

'만나다, 만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지라도, 이는 결코 쉬운 말이 아니다. 사전에 실린 '만남'의 비슷한말은 접선, 접촉, 미팅, 교제이다. 그런데 그 어떤 말도 '만남'에서 연상되는 느낌과 쉽게 일치하지 않는다. '만나다'의 비슷한말로 제시된 '교차하다, 당하다, 대면하다'도 마찬가지이다. '만나다'의 옛말은 '맞나다'이다. 맞이, 마중 등에 쓰인 '맞다'에서 온 말이다. 그렇다면 만남이란 어쩌다가 생긴 일이 아니라, 내 앞으로 다가오는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맞아낸 결과가 아닌가? 인연을 만나고, 풍년을 만나고, 때를 만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나아가 역사도 만나고, 내일도 만나고, 의식 깊이 묻어둔 기억을 꺼내서 만나볼 수도 있다.

이번 여름, 중앙아시아 여행길에 고려인 마을을 들렀다. 그곳에서 우리는 고려인 2세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잔치국수를 먹었다. 달달한 맛이 더해지고 소고기가 올라간 잔치국수는 늘 먹던 것과는 달랐지만, 나그네 처지에서 열흘 만에 먹는 것이다보니 이국땅에서 느끼던 허전함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타향에 정착한 고려인이 이런 맛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식당 이름이 'MANNAM'이다. 현지 문자로 풀어 놓으니 요즘 유행어대로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똑같다. 글자들이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먼 이국땅에 강제로 정착하게 된 지도 1세기, 이미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삼고 있는 이들이 잊지 않은 우리말 조각이었다. 누구를 만나려 하는가? 어떤 만남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토록 자주 쓰던 말을 앞에 두고 처음으로, 만남의 의미에다가 '뭉클함'이란 뜻을 더한다.

이미향 영남대 글로벌교육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