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놀오염 사건에서 시작된 영남지역 지자체들의 낙동강 수원 갈등이 30년 넘게 풀리지 않고 있다. 지난 4월 낙동강을 끼고 있는 지자체와 정부 부처가 물 분쟁 해소 방안에 합의했지만, 지난달 새로 취임한 자치단체장들의 갈등을 커지면서 기존 합의는 백지화 수순을 밟고 있다.
낙동강 식수원 문제가 본격 제기된 것은 1991년 페놀오염 사건이다. 경북 구미의 두산전자가 그해 3월 14일 페놀 원액 30톤을 낙동강으로 유출하면서 대구 수돗물이 오염됐다. 5개월간 페놀 폐수가 325톤이나 무단방류돼 대구시민들이 두통과 구토, 피부질환까지 보이자, 관련자 13명이 구속됐다. 환경부 장관 경질과 두산그룹 회장 사퇴로 이어졌다. 페놀은 2008년 3월에도 경북 김천공단에서 낙동강으로 유출돼 대구와 낙동강 하류 주민들을 놀라게 했다.
2004년 1월 14일에는 발암 의심 물질인 다이옥산이 구미공단에 있는 화학섬유업체에서 유출됐다. 다이옥산은 2009년 1월에도 구미공단서 낙동강으로 유출됐고, 2018년 5월에는 호르몬 변화 및 생체독성을 유발하는 과불화화합물이 구미공단 반도체업체 등에서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1991년부터 2018년까지 대규모 낙동강 수질오염 사고만 9차례나 발생했다.
낙동강이 수질오염에 취약하다 보니 구미공단의 상류로 취수원을 이전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부는 2015년에야 대구 취수원을 구미 해평으로 이전하는 내용을 담은 기본계획을 고시했다. 대구는 구미와 논의했지만 갈수기 수량 부족과 수질 악화, 상수원보호구역 확대에 따른 재산권 침해를 우려한 구미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페놀 사건 후 신규 취수원 확보에 사활을 건 지자체는 대구만이 아니었다. 부산시도 낙동강을 대체할 취수원 확보에 공을 들였지만 지자체 간 이해관계는 쉽게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었다.
지지부진하던 낙동강 물 문제는 2018년 10월 '국무총리 주재 관련 지자체장 회동'을 통해 실마리가 잡혔다. 지난해 6월 24일 '낙동강통합물관리방안'이 정부 계획으로 확정됐고, 올해 6월 30일 예비타당성 사업으로 통과됐다. ①구미 해평취수장 물을 대구가 공동취수하고 ②대구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 보호를 위해 기존 식수원인 청도 운문댐 물을 울산과 나누며 ③합천 황강 복류수와 창녕 낙동강변 여과수는 부산과 동부경남에 공급하는 내용이다.
해평취수장 대구 공동취수를 골자로 하는 '맑은 물 나눔과 상생발전에 관한 협정서'도 지난 4월 체결됐다. 대구의 하루 취수량 58만 톤 중 30만 톤을 해평취수장에서 취수하고, 구미에 상생지원금을 지원하는 등 보상책도 포함됐다.
실행만 남았던 대구취수원 이전 문제는 지난달 민선8기 지자체가 출범하면서 백지화되는 분위기다. 김장호 구미시장은 취임 후 "지난 4월 협정은 시민과 시의회 동의를 거치지 않았고, 임기 말 단체장들이 체결한 터라 효력이 없다"며 재검토를 요구했다. 그러자 홍준표 대구시장도 지난 17일 "더 이상 원인 제공자에 의해 끌려다니는 물 문제 해법은 하지 않겠다"며 협정을 해지한다고 환경부 등 5개 기관에 통보했다. 대구시는 △지방선거 당시 구미시장 후보의 상생협정 반대 활동과 △현재 상생협정의 요건 미비 및 무효 주장 △다른 취수장 협의 요구 등 구미시의 귀책사유로 협정 이행이 어렵다며 이같이 결정했다.
홍 시장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구미시와의 물 분쟁을 종료한다"며 "대구의 상수원을 더 이상 구미지역에 매달려 애원하지 않고, 안동시와 상류댐 물 사용에 관한 협력 절차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홍 시장은 지난 11일 권기창 안동시장과 만나 안동댐과 임하댐의 원수를 대구 식수원으로 공급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권 시장은 당초 안동시가 원수를 정수해 수돗물을 공급할 계획이었지만, 홍 시장과 논의 후 원수 공급에 동의했다. 환경부는 협정 해지 통보에 대해 "숙려기간을 두고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대구와 구미의 입장 차가 커서 사실상 백지화 수순에 돌입했다.
부산과 경남의 갈등도 재연되고 있다. '낙동강 먹는 물 공급사업'에 따라 합천의 황강 복류수 45만 톤과 창녕의 강변 여과수 45만 톤 등 총 90만 톤을 개발해 42만 톤을 부산에 우선 공급하고, 나머지 48만 톤을 김해와 창원 등 동부 경남에 공급하겠다는 청사진이 합천과 창녕, 거창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힌 것이다.
주민들은 "취수시설이 설치되면 농업용수가 고갈되고 상수원보호구역 지정에 따른 각종 규제 등으로 재산권 침해가 우려된다"며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박완수 경남지사도 취임 후 환경부에 '취수 지역 주민 의견 수렴을 위한 민관협의체 구성’을 요구했고, 경남도의회와 합천군의회, 창녕군의회는 사업 중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어렵사리 타결된 낙동강 물 분쟁 협약이 곳곳에서 백지화 단계로 치달으면서 공공재인 식수 공급망을 둘러싼 근본적인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