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과잉규제에 묵묵히 따라야 하는 이 현실

입력
2022.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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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교수 한 분 모셔 학교에서 세미나를 할 때 필요한 서류 목록이다.

1. 세미나 신청서(서명 필수, 양식첨부) - 세미나 전 메일로 보내고 세미나 후 서명한 서류를 제출

2. 세미나 참석자 명단(서명 필수, 양식첨부)

3. 세미나 중 촬영한 사진 파일

4. 강연자료(ppt 등)

5. 강연자 이력서, 개인정보동의 활용서

6. 강연자 여권 사본(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첫 면)

7. 강연자 출입국 도장이 찍힌 여권의 면 사본(입국일자, 출국일자가 확인되어야 함)

8. 강연자 자필 사인 영수증

9. 비 거주자판정 기준표

10. 식비 영수증(1인 3만 원 이내)

이 사례는 교수들에 대한 불신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준다. 행여 외국인 방문을 핑계로 자기들끼리 모여 비싼 식사로 잔치를 벌일까 하여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꼼꼼하게 서류 챙길 것을 요구한다. 몇십만 원의 부당 지출을 막으려고 열 개의 서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서류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 집단을 잠재적 범죄자처럼 취급하고 있다. 이러한 의심을 통해 얻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서류들이 외국인 교수의 세미나 내용이 얼마나 충실한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거다. 증빙 서류를 통한 규제로는 수준 높은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질 수 없다.

사실 더 심각한 교수와 대학의 부당행위는 이런 몇십만 원짜리 지출이 제대로 이루어지냐 마냐 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은 부당행위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 학위 수여는 대학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대학은 학위 수여에서 일종의 독점권을 갖는다. 이 중요한 독점권을 남용하지 않기 위해 모든 대학은 학위 수여에서 엄정한 절차를 갖추고 있다. 학교에 따라 다르지만, 박사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학교 교수가 포함된 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통상 두 차례 이상 자신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심사위원들의 논평과 시정 요구를 받아 논문을 수정하고 보완해 가면서 논문의 완성도를 높여간다. 이러한 절차가 학위 논문의 우수성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런 형식과 절차만으로는 논문의 우수성을 절대 보장하지 못한다. 지도교수를 포함한 위원회의 학문적 권위와 엄밀성, 그러니까 직업윤리가 없다면 모든 절차는 껍데기일 뿐이다. 실제로 함량 미달의 논문은 엄격한 절차 속에서도 곳곳에서 양산되어왔다. 이건 한 대학의 표절 심판 문제를 넘어선 것이다.

대학과 교수에 대한 불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반값 등록금 요구도 사실은 대학과 교수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최근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학과 교수가 도덕적 학문적 권위를, 그러니까 직업윤리를 스스로 내려놓았을 때, 대학 앞에 놓인 것은 자유의 박탈과 불신에 기반한 규제이다. 어쩔 수 없다. 부도덕과 규제의 악순환으로 피해를 보는 건 대학과 교수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되겠지만, 대학과 교수가 학문과 도덕적 권위를 스스로 저버린 이상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묵묵히 연구와 교육에 매진해 온 대다수 교수로서는 참담함을 느낄 수밖에 없겠으나, 당분간은 침묵하며 불편하더라도 서류를 잘 갖추면서 불신에 기반한 규제에 순응하는 것이 좋겠다. 학문 공동체의 부실에 대한 책임은 공동으로 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규제 순응은 지극히 부차적인 사항일 뿐이고 진정 대학과 교수 사회가 할 일은 학문적, 도덕적 권위와 직업윤리의 회복이어야 할 것이다.


김진영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