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를 내려다보듯 비추는 카메라의 앵글 한가운데로 불쑥, 옹골차 보이는 두 손이 등장합니다. 단단하게 여문 손끝을 따라가다 보면, 어디서나 흔히 볼 법했던 새까만 연필은 순식간에 예사롭지 않은 화가의 도구가 됩니다. 지우개 한 번 쓰는 법 없이 힘있게 이어지는 선이 묘한 표정을 머금은 한 남자의 얼굴을 멋지게 그려내죠. 화면 위로는 누군가의 심지 곧은 목소리가 단조로운 음악처럼 깔립니다. 이 영상의 제목은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여러분, 무섭다는 건, 간단하게 말하자면 스스로에게 기대가 높다는 거예요. 뭐든 욕심이 나면 내 손이 내 생각대로 따라 주지 않는 게 실망스럽고 싫어져요. 실패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실패를 아예 안 하려고 시도조차 안 하게 되죠. 자신의 기대를 외면하는 거예요. 당장, 백지 위에 아무 선이나 그려 보세요. 망쳤나요? 아닐 걸요. 일단 아무 선이나 긋고 시작하면 그 위에 그리는 선들은 오히려 부담이 없어지거든요.”
‘그리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리는’ 대신 ‘살아가는’을 대입해도 크게 빗나가지 않는 이야기예요. 그림에 빗대어 일과 삶에 대해 말하는 이 사람의 영상은 ‘콘텐츠의 홍수 지대’로 불리는 유튜브 안에서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어요. ‘선으로 쓰는 비디오 에세이’라는 그만의 장르죠.
스스로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 자처하지만, 정작 영상에선 그리는 법을 다루지 않아요. 그가 주시하는 소재는 주로 인간이 겪는 ‘내면의 소음’이죠. 외로움과 권태, 자기연민과 열등감, 노력과 성취, 실패와 좌절 등 자신이 직접 겪어 본 삶의 굴곡을 담담하게 말해요. ‘누드 크로키’를 그릴 때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난 삶의 흠결을 정물화처럼 보여 주죠. 보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구독자 80만 명의 드로잉 유튜브 채널 ‘이연(LEEYEON)'을 운영하는 생활예술인 이연수(30)씨의 이야기입니다.
연수씨의 일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말과 그림’을 재료로 작업하는 독립 크리에이터입니다. ‘직업인으로서의 유튜버’가 된 것은 2년 전. 그전엔 평범한 회사원의 얼굴을 한 6년 차 디자이너였죠. 다섯 평 자취방의 월세 45만 원을 내기 위해 꾸역꾸역 회사에 저당 잡힌 시간을 견디던 직장인 시절, 그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자신과 일 사이의 관계는 아무리 오래 함께 있어도 도저히 정이 붙지 않는 상대와의 연애 같다는 사실을요. 연수씨에게 ‘디자이너의 일’이란, 남들이 아무리 ‘흠 없이 완벽한 애인감’이라 추켜세워도 단둘이 남겨지면 서먹한 남자친구 같았다고 해요.
우울의 늪에 빠져들던 그때, 그를 구한 건 다시 ‘그리는 행위’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말보다 그리는 법을 더 먼저 익혔던 세 살 무렵부터, 네임펜으로 그린 그림을 인터넷 카페에 올리던 유년 시절을 지나, 미술학원 한가운데 1등으로 뽑힌 자신의 그림이 걸리던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연수씨의 인생에서 ‘그린다’는 것은 곧 ‘나로 존재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거든요. 직장인으로서 요구받은 대로 기능하기를 멈추고, 다시 ‘나’로 존재하기 위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그저 종이와 펜만 있으면 무작정 그리던 옛날과는 달라진 점이 있었어요. 그림에 자신의 일부를 녹이기 시작한 거죠. 그러면서 ‘나다움이란 뭘까’를 고민합니다. ‘뾰족하고 모나서 늘 세상 밖의 누군가랑 부딪히는 부분에 진짜 나만의 개성이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따지면 ‘왜 디자인을 매번 이리 밋밋하게 하느냐’며 화를 내던 상사의 꾸중도 뒤집어 보면 ‘나다움’을 알려 주는 힌트였어요. 연수씨는 깨닫습니다. “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단순함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던 미학이었어.”
그때부터 ‘은밀한 이중생활’이 시작됩니다. 낮엔 온종일 휴지와 기저귀 포장재를 디자인했지만, 밤엔 오래 연필을 놓아 굳어버린 손을 풀며 정력적으로 그림을 그렸죠. 매혹적인 상대와의 밀회는 언제나 덜덜 떨리고 두려운 법. 열렬히 사랑하는 만큼 기대가 커졌고, 그 기대가 좌절이 될까봐 무서웠습니다. 조심스러운 시행착오 끝에 쌓아 올린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은 훗날, 100만 명이 본 13분짜리 영상이 되고, 독자의 손에 들린 한 권의 책이 됩니다. 이 책에 담긴 건 ‘그림 그리는 법’이 아니에요. 용기 내어 무언가를 열망하거나 희구하기로 결심한 ‘드리머(dreamer)’들을 위한 응원이죠.
10년 전, 스무 살의 연수씨는 미술로 먹고살 수 있는 길이란 디자이너가 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서른 살의 연수씨는 작가로서, 크리에이터로서, 저자이자 강연자, 또 필요할 때엔 종종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업(業)을 ‘현재 진행형’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생활예술인으로서 일하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이름도 지어 줬죠. 본명에서 돌림자인 ‘수’자를 빼고 ‘펼칠 연(演)’자만 남긴 ‘이연(李演)’. 무엇이든 재량껏 펼치면서 살고 싶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또 하나, 오랜 시간 불화했던 회사원의 자아를 내려놓고, ‘나’에게 소속되기로 합니다. 두루미에겐 호리병이, 여우에겐 접시가 필요하듯, 연수씨도 자신의 생김새에 꼭 맞는 일의 그릇을 찾은 거죠. 1인 회사 '이연 스튜디오'의 대표 이연이자 유일한 직원 이연으로 살고 있는 1인 다(多)역의 그를 지난 15일 만났습니다. 그에게서 ‘직업인으로서의 생활예술인’의 삶에 대해 들어 봤어요.
‘그림 그리며 먹고살 수 있는 어른’이 되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던 10대를 지나 스무 살이 되던 해, 연수씨는 서울의 한 미술 대학에 합격했어요. 그렇게 태어나고 자란 작은 지방 도시를 떠나게 됩니다. 물리적인 환경의 크기만 변한 게 아니었어요. 그가 가진 ‘미술의 세계’ 역시 어마어마한 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죠.
조형예술학과 첫 수업에서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제부터 청년 작가다.’ 평생 얹혀사는 신세로 눈칫밥만 먹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마법 학교에 떨어지게 된 해리 포터처럼, 연수씨의 가슴도 거세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서양화, 동양화, 조소, 현대미술, 개념미술까지… 경계를 넘어 가리지 않고 배우며 흡수하는 시간이었죠. 종이 위에 뭔가를 그리는 행위만이 미술의 전부라 생각했던 그에겐, 마치 시공간이 폭발하듯 팽창하는 듯한 경험이었다고 해요.
이 시간은 희열이라기보단 좌절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게, 그전까지 연수씨는 ‘칭찬이 크게 들리는 쪽’으로만 걷는 사람이었어요. 높은 점수를 받는 게 좋아서, ‘합격’이라는 단어가 좋아서 정상 궤도의 트랙 위를 성실하게 달려 왔죠.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니 누구도 ‘연수는 역시 잘해’라는 칭찬을 하지 않는 겁니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 갑자기 커지면, 자기 자신이 한없이 작아 보이잖아요? 저 역시 그랬어요. 미대에선 저만의 재능이라 여겼던 것들이 더 이상 두드러지지 않았던 거죠.” 당장 눈앞에 놓인 길은 수십 갈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문이 열렸는데, 어떤 문으로 들어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다 자꾸 스텝이 꼬이고 넘어졌죠.
“제게 대학생으로 산 4년은 ‘너는 어떤 사람이야?’를 묻는 시간이었어요. 그땐 참 괴로웠는데, 돌이켜보면 시키는 그림만 그리던 모범생이었던 저에게 이 시간은 꽤 값졌던 거 같아요. 요즘 제 친구들이 제게 자주 털어놓는 말이 있어요. ‘20대의 나는 내게 주어진 선택지가 단 하나뿐이라고 착각했었다’고. ‘그래서 너무 후회된다’고. 다들 그렇게 말해요. 저는 기억이 좀 달라요. 당시의 저는 반대로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막막하고 불안했죠.” 바로 그 불안이 ‘너는 어떤 사람이야?’라는 질문에 끈질기게 매달리게 만든 동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부지런히 여러 문을 열어 본 거죠.
미대생에게 졸업 전시란 창작의 산고를 처음으로 앓아 보는 중요한 통과의례인데요. 전공이 두 개였던 연수씨에겐 그 고통 역시 ‘두 배’였죠. 졸업 작품을 구상하는 미술학도들은 이때 자신에게 묻습니다. ‘내 작품 세계의 결정체는 무엇인지’에 대해서요.
“졸업 전시를 앞두고 저에 대해 확실히 안 것들이 있어요. 첫째, 나는 모든 작업에서 심플함을 추구한다. 둘째, 러프(rough)한 드로잉을 좋아한다. 셋째, 차가운 색, 그중에서도 파랑을 자주 쓴다. 넷째, 말과 글을 이용한 작업에 끌린다. 작가로서 작업을 계속 만들어 나간다면, 제 세계의 원형이 될 만한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진 거예요. 진짜 신기한 건, 제가 지금 ‘이연’으로서 만들고 있는 모든 작업이 이 문법을 따르고 있다는 거죠.”
하지만 꿈 대신 밥을 먹고사는 인간의 처지가 늘 그렇듯, 졸업을 앞둔 대학생에게 한시가 급했던 건 작가가 되는 것보다 ‘직장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연수씨 역시 마찬가지였죠. 어렵게 찾은 개성의 날을 제대로 갈아 보기도 전에, 그는 생활용품의 포장재를 디자인하는 작은 회사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업무 강도 속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으로 일하며 시간을 보내죠. ‘남들과 다를 바 없이 비슷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안전함의 감각 속에서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는 동안 점점 더 선명해졌습니다. 자신은 ‘디자이너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요.
“미술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먹고살 방법이 디자인뿐인 거 같은데, 제 모습이 도무지 믿음직스럽지가 않은 거예요. 일터에서의 모든 순간이 마치 ‘척’ 같았어요. 디자이너라는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것처럼 느껴진거죠. 주변 동료들에게, 또 비슷한 일을 하는 친구들에게 많이 물어봤죠. ‘너는 디자인이 재밌어?’ 그랬더니 다들 재미있대요. 망설임도 없이. 그게 저를 무척 슬프게 했어요. 자신 없는 건 나뿐이구나. 여기서 나만 진짜가 아냐.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첫 회사의 월급은 180만 원, 입사해서 3년 동안 모은 돈은 2,000만 원. 연수씨는 이 돈으로 자신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인 스물일곱을 선불로 주고 사기로 합니다. 자신의 시간을 어딘가 팔지 않고, 완전하게 나만을 위해 써 보자고 다짐하죠.
“아끼고 아껴서 한 달 기준 자취 생활비가 약 120~130만 원 정도라고 하면, 딱 1년은 회사에 다니지 않고도 살 수 있겠더라고요. 회사에 다니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어떻게든 연명해 보자고 생각했어요. 일단 나를 어딘가에 헐값으로 팔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 시간이 간절하게 탐이 났어요. 그러니까 그 돈은 ‘나’라는 프로젝트에 넣는 투자금이었던 거죠.” 그렇게 재건과 모색의 1년이 시작됐죠.
준비 없이 퇴사를 감행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회사를 다닐 때에도 연수씨의 퇴근 후 일상엔 언제나 ‘퇴사 파일럿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있었어요. 파일럿 프로그램(Pilot Program)이란 시청자의 반응과 흥행 여부를 미리 점쳐 보기 위해 정식으로 발표하기 전 작은 규모로 만드는 프로그램을 일컫는데요. 조심스럽고 겁이 많은 연수씨는 언제나 큰 결정을 앞두고 이 ‘파일럿 버전’을 만들었어요. 단박에 거대한 결심을 내리기엔 확신이 부족하니까, 미리 작게라도 해 보며 가능성을 엿보는 거죠.
‘해 볼 만하다’는 결론이 나와도 작정하고 달려드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어요. 도화지 위에 연한 물감을 조금씩 떨어트리듯 서서히 물을 들이는 게 ‘겁 많은 연수씨’만의 전략이었죠. 첫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던 때, 연수씨는 밤마다 로고 디자인부터 카페 브랜딩까지 여러 가지 형태의 일에 아르바이트로 도전해요. 이것저것 하다 보니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건 ‘디자인이 아닌 드로잉’이라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됐고요.
갑작스러운 퇴사로 삶의 정규편성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던 2018년, 연수씨는 ‘파일럿’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자아를 황금시간대로 불러냅니다. 시청률이 지지리도 안 나오던 메인 드라마가 어쩌다 끝나 버렸으니, 무엇이든 틀어야 했어요. “단단한 껍질을 쓰고 사는 갑각류가 껍데기를 벗고 나와 연약한 알맹이로 세상과 마주한 기분이었어요. 껍데기 속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었죠. 두려웠어요. 반년도 안 돼 재취업을 하겠다고 면접까지 보러 다녔었거든요. 껍데기를 잃어버린 소라는, 당장 자신의 몸을 숨기겠다고 바닷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쓰기도 한대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던 거 같아요.”
허겁지겁 쓰레기를 뒤집어쓰는 대신, 연수씨는 어설픈 껍데기라도 직접 만들어 보기로 합니다. 원데이 클래스에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림을 가르쳐 보기도 하고, 플리마켓에서 직접 그린 그림을 팔아 보기도 했죠. 자신을 꾸역꾸역 ‘작가’라고 부르며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대개 그림을 그리는 일에 삶을 빗댄 자전적인 이야기들이었는데, 이때 썼던 글들이 훗날 이연으로서 만든 영상의 뼈대가 되기도 하죠.
일상의 소소한 모험도 멈추지 않았어요. 평생 재미없는 생머리였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버렸어요. 한동안 미용실에 가지 않고, 타고난 곱슬머리 그대로도 살아봤대요. 머리를 펴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는데, 사정없이 꼬부라지는 머리카락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냥 나로도 괜찮구나’를 확인하는 시간이었죠.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죠.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 다니며, 또 회사에 다니며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모난 부분을 부지런히 깎습니다. 둥글게 둥글게, 남들과 비슷하게, 거슬리지 않게. 연수씨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개성 강한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미대에서는 ‘형식을 못 깨는 모범생’이라는 게 콤플렉스였죠. 하지만 그건 곧 ‘이상하리만치 규율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드문 성격이기도 했어요. 첫 회사에서는 ‘신입인데 대리처럼 군다’, ‘디자인을 하다 만다’는 꾸지람을 자주 들었어요. 뒤집어 말하면 ‘자신만의 미감이 견고하다’는 뜻이었죠. 연수씨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자꾸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모난 부분을 더 날렵하게 갈아 보기로 합니다. 창작에서만큼은 그 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도구일 수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어느 날은 버스를 기다리다가 마트 출입문에 붙은 공고를 보게 됐어요. 월급이 200만 원, 제가 3년 동안 디자이너로 일하며 받은 월급과 비슷했죠. 처음엔 충격이었는데 이게 또 묘한 위안이 되더라고요. 돈 벌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하고 싶은 일을 돈 버는 일과 연결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힘들었는데, 그걸 내려놓게 되더라고요. 어떤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어요. ‘네가 사랑하는 창작에게 돈을 벌어 오라고 시키지 말라. 네가 그 창작을 먹여 살려라.’ 생각해 보니 저는 제 창작에게 돈을 벌어 오라고 닦달하며 괴로워했던 거였어요.”
사랑하는 창작을 지키기 위해 연수씨가 새롭게 시작한 건 유튜브였어요. 그리는 일을 오래 지키려면 ‘노출 훈련’이 반드시 필요했거든요.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을 그림을 언제까지고 그릴 순 없으니까. 휴대폰을 낡은 거치대에 덜렁 걸친 채 미숙한 크로키를 그려 나갔습니다. 그게 첫 번째 영상이었어요.
‘잘 해내야 한다’는 간절함은 덜고, 긴장으로 자주 굳는 손에 힘을 뺐습니다. 배경음악도, 눈길을 끄는 편집 기술도 없었어요. 대신 창작하는 태도에 대한 짧은 생각들을 솔직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압축해 고명처럼 얹기 시작했죠. ‘한번 해 볼까?’로 시작한 파일럿이었지만, 천 명대를 맴돌았던 구독자가 어느 날 갑자기 수만 명대로 올라 버렸죠.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유튜브’라는 공간에서 마침내, ‘작가’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찾게 된 겁니다.
연수씨에게 2018년은 모색의 시간인 동시에 자신 안으로 깊게 빠져드는 침잠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시끄러운 세상의 소음을 모두 소거하고, 철저히 고립되어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 연수씨는 이런 시간이 창작자뿐 아니라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말해요.
지금도 평일 중 이틀은 꼭 ‘완벽한 혼자’로 지내는 이유입니다. 일과 삶의 방향키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삶의 모든 관문마다 휘몰아치는 정상성의 파도에 휩쓸려 가지 않으려면, 남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과 만나야 하거든요. 충분히 깊은 곳으로 내려가 바닥의 무늬를 보고 올라왔을 때, 다니고 싶었던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연락을 받습니다. 그때 연수씨는 생각했어요. ‘이제 방향키는 내가 쥐고 있어. 회사도 이용할 수 있는 거야.’
자신만의 세계를 단단히 바로 세운 다음 선택한 회사는 ‘스스로 만든 학교’ 같았다고 해요. 디자이너의 안목과 취향, 경험과 역량을 모두 키울 수 있는 시간이었죠. 연수씨는 스타벅스에서 텀블러나 컵과 같은 MD 상품을 디자인하는 일을 했는데요. 이때 익힌 감각이 훗날 유튜버 이연으로서 기획 상품을 만들 때나 책 표지를 디자인할 때 도움이 됐죠. 협업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매너나 메일을 잘 쓰는 법과 같은 ‘직장생활의 상식’ 역시 1인 기업을 운영하는 데 톡톡한 밑거름이 됐습니다. 연수씨는 회사를 독립을 준비하는 베이스캠프로 이용했어요. 주말을 빠듯하게 쪼개 운영하던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가 50만 명이 됐을 때, 회사를 ‘졸업’하기로 결심했고요.
회사를 나왔으니, 무엇을 만들던지 ‘절대다수가 가진 미감’에 끼워 맞출 필요가 없었습니다. 연수씨는 ‘이연’으로서 만드는 영상을 온통 자신다운 것으로 채웠어요. ‘사람들이 뭘 좋아할까’에 매몰되기보단 ‘나는 뭘 좋아하지’에 초점을 맞췄죠. 가장 좋아하는 도구는 연필과 만년필, 선으로만 이루어진 흑백 드로잉이 주를 이룹니다. 화면은 담백하지만 내용엔 깊이를 담아요. 이야기의 깊이는 대개 자전적 고백에서 나오죠. 고립된 시간 속에서 끌어올린 화두가 영상의 주제가 됩니다.
연수씨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자연스러운 멋’이에요. 과감하게 힘을 뺍니다. “뭐든 멋있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힘을 빼고 대충하는 듯해요, 근데 잘하죠. 완벽하게 능숙해져 그런 거예요. 어떤 일이든 너무 애쓰는 순간 멋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회사 그만두고 수영장에 다니던 시절 할머니들을 보면서 깨달았어요. 물 밖에선 느릿느릿 걸어 다니는 70대 할머니들이 수영장을 스무 바퀴씩 왔다갔다 하시는 거예요. 젊고 힘 좋은 저도 힘든데… 그게 다 흐물거리는 해초처럼 힘을 빼서래요.” 그래서 연수씨는 유튜브 채널 운영 5년 차에 접어드는 지금까지도 비슷한 장비를 쓰고, 같은 포맷으로 영상을 찍어요. 거리의 소음이 그대로 들어간 인디밴드의 데모 음반처럼, 거칠지만 그 자연스러움 자체가 멋스러움처럼 보이도록요.
의외로 회사에서 배운 감각들이 콘텐츠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디자이너로서 보낸 6년의 세월은 ‘보는 사람을 의식하며 만드는 근육'을 길러 줬거든요. 섬네일 이미지를 만들거나 직접 집필한 책의 제목을 뽑을 때는 디자이너로 일할 때처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염두에 둔대요. 자신만의 개성과 세상의 유행 사이에서 절묘한 중간 지점을 찾을 수 있는 균형감각이 길러진 거죠. 직장인 디자이너로서, 또 크리에이터로서 ‘투잡’을 뛰면서 생긴 재능입니다.
아직도 사람들은 많이들 물어본다고 해요. ‘그 좋은 직장 관두고 불안하지 않아?’ 연수씨는 대답합니다. ‘오히려 회사를 다니던 그때가 더 불안했다’고. “게임만 해 봐도, 캐릭터별로 타고난 성격과 본성이 다 달라요. 그래서 마법사는 마법사다워야 하고, 도적은 도적다워야 하죠.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맞는 소속은 저 자신이었던 거 같아요.” 파트타임 학원강사, 디자이너이자 회사원, 외주 제작 프리랜서 등을 거쳐 ‘드로잉 유튜버’라는 자신만의 길을 뚫는 동안, 연수씨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어떤 캐릭터인가를 찾는 과정엔 효율이나 가성비가 끼어들 수 없구나. 삽질과 시행착오는 오롯이 자신만의 몫이구나.’
“’나는 어떤 캐릭터인가’를 찾는 여정에서 깨달았어요. 그 답은 ‘쉬운 선택’이 아니라 ‘빠듯한 선택’에서 찾아진다는 사실을요. 우리는 보통 급해서 한 선택이나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 선택으로 인생을 채우거든요. 저는 그렇게 한 선택이 하나도 제 것 같지 않았어요.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요. ‘이거 어렵겠는데?’ ‘내가 감히 탐을 내도 될까?’라는 생각이 드는 빠듯한 결정이 저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데려다 준 거 같아요.”
연수씨는 명함에 회사를 앞세우지 않고 딱 두 글자만 남기고 싶었대요. 스스로 지은 이름 ‘이연’. 그래서 남들은 쉽게 못 하는 빠듯한 선택을 했죠. 자신의 인생에서 ‘회사’라는 잔가지를 잘라 내고 과감하게 ‘나에게 소속되어 일하는 삶’에 도전한 겁니다.
◆'1인 창작자'로서 혼자를 경영하는 방법에 대한 이연수만의 노하우는 속편 기사 일잼포인트에서 이어집니다.
‘이연 스튜디오’의 대표이자 나 홀로 직원인 연수씨는 다양한 호칭으로 불려요. 작가, 유튜버, 크리에이터, 저자, 강연자. 다 좋아하는 말들이지만, 자신의 목소리로 스스로를 지칭할 땐 ‘생활예술인’이라고 칭합니다.
“생활예술인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예술인이 되는 건 너무 별일 같은데, ‘생활예술인’이라고 하면 별일 같지 않잖아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기를 바라요. 평생 가깝게 두고 싶어서요. 창작을 제 ‘업(業)’이라고 정의하면 괴로워질 것 같아요.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면 힘들다’는 사람들의 말이 무서웠던 적이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너무 ‘업’으로만 여기지 말자. 내 삶에 늘 있는 것, 가까이 있는 것, 의지가 되는 것, 이유가 되는 것으로 두면 그렇게 괴롭지 않을 테니까.”
어떤 분야든 오래 버틴 사람이 결국 ‘잘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죠. 누군가 연수씨에게 ‘당신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원동력을 믿지 않아요.’ 그 대신 연수씨가 믿는 건 ‘매일매일의 성실함’이라고 합니다. 연수씨의 20대는 ‘일단 해!’의 연속이었어요. 일단 뭐든 해 봐야지 그다음이 보이니까. 돈이 없다는 핑계, 시간이 없다는 핑계와 안간힘을 쓰며 맞붙었죠. 많은 이들이 ‘가난해질까 봐’ 미술을 포기하곤 하는데요. 연수씨는 ‘차라리 겪어 봐야 안다’고 말합니다. 부족한 돈, 불투명한 미래, 어중간한 재능, 무명까지 겪어 보면 생각보다 그때부터 ‘그것을 바꿀 용기’가 생긴다는 거죠.
“저에게 그림은 도피처 같아요. 도망치고 쉴 수 있는 공간, 삶에서 지칠 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 살면서 제대로 믿는 구석이 하나만 있으면 저는 어떤 방황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에겐 그림이 그런 믿는 구석이에요. 요즘엔 궁금해요. 10년 뒤 나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몇 년 전에 제가 일기에 이런 말을 써 놨더라고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창작을 할 수 있을까.’ 앞으로 또 어떤 시간이 쌓일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위로가 되는 창작을 하기를 바라요.”
탁월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두려워하는 창작자들을 향해 연수씨는 자신의 책 속 한 구절을 권합니다.
‘내가 겪은 바에 의하면 멋진 일은 대개 두려움을 동반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만큼 그 여정은 험난하다. 그럴 때는 이 사실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내가 지금 굉장히 멋진 일을 하고 있구나.’ (책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中)
※ 크리에이터 이연의 더 자세한 이야기는 9월 둘째 주 '한국일보 밀크티' 유튜브 채널(www.youtube.com/밀크티MilKT_HK)에 업로드됩니다.
▶ 크리에이터 이연의 일잼포인트 '혼자를 경영하는 법' 읽으러 가기 (관련기사 ②)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82311360005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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