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내놓고 팔아라"...콜롬비아 좌파 대통령의 역발상

입력
2022.08.2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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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마약 밀매 규모, 2016년 GDP 3.8% 추정
10년간 밀매 3배 증가, 미국 코카인 90% 콜롬비아
미국 "마약 합법화 지지 안 해" 콜롬비아 압박할 듯

세계 최대 마약 생산국이자 악명 높은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고향인 콜롬비아가 “마약과의 전쟁을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무수한 인명 피해를 낳는 소탕 작전 대신, 마약 합법화로 ‘검은돈’을 양지로 끌어내 마약 카르텔의 ‘자금줄’을 말려 버리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콜롬비아산 불법 마약으로 골머리를 앓는 미국이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있어 국제적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콜롬비아 마약 합법화로 마약 뿌리 뽑는다

21일(현지시간) 미국 CNN방송과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이달 초 출범한 콜롬비아 새 정부는 1호 정책 의제로 ‘마약 비범죄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미 의회에는 기호용 대마초 합법화 법안이 제출됐고, 코카인에 대해서도 국가 규제 아래 합법화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 사상 첫 좌파 정권을 탄생시킨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이 ‘마약 대국’이라는 오명을 떨치기 위해 내놓은 승부수다.

페트로 대통령은 국내 마약 생산과 유통을 차단하는 대신 미국 등 외부의 마약 수요를 줄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해왔다. 단속과 처벌 중심 정책은 마약 거래를 더욱더 음성화해 마약 카르텔의 배만 불린다는 것이다. 콜롬비아 정부 연구에 따르면 2016년 북미와 유럽, 아시아 등에서 마약 카르텔이 거둬들인 코카인 불법 수출 수익은 콜롬비아 국내총생산(GDP)의 3.8%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분쟁 격화, 인명 피해… ‘범죄와의 전쟁’의 역설

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마약과의 전쟁은 별 성과가 없었다. 미국은 자국으로 흘러드는 콜롬비아산 마약을 뿌리 뽑기 위해 2000년 이후 130억 달러(약 17조5,000억 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자금과 군사력을 지원했지만, 불법 마약 거래는 오히려 더 늘었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에 따르면 2020년 콜롬비아 코카나무 재배지 면적은 14만3,000헥타르로 2019년(15만4,000헥타르)보다 7% 감소했지만 코카인 생산량은 1,228톤으로 2019년(1,137톤)보다 8% 증가했다. 이웃 국가인 페루와 볼리비아를 합친 것보다 2배 이상 많다. 미국 정부도 콜롬비아의 코카인 생산량이 최근 10년 사이 3배 증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약 카르텔이 정부를 겨냥한 보복에 나서면서 무고한 희생도 잇따랐다. 2016년 콜롬비아 정부와 최대 좌익 반군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이 평화협상을 체결한 이후 설립된 ‘진실규명위원회’는 50년 내전 과정을 조사한 보고서에서 “마약과의 전쟁은 폭력과 갈등을 장기화한 핵심 요인이었다”고 지적하며 “내전 기간 45만666명이 사망하고 12만1,768명이 실종됐다”고 밝혔다. 지금도 콜롬비아에서 마약 밀매는 구금 원인 1위로, 수감자 13%가 마약 혐의와 관련돼 있다.


마약 시장 양성화 추진… 미국 반대는 걸림돌

페트로 정부는 정부 통제 아래 공공 시장에서 마약이 거래되도록 하는 정책 대전환으로 오랜 분쟁을 끝내겠다고 결심했다. 생계를 위해 코카인을 재배하는 가난한 농가들은 처벌받을 두려움 없이 합법적으로 시장에 물건을 내놓을 수 있다. 펠리페 타스콘 마약정책 책임자는 “마약 시장이 양성화되면 수익성이 낮아져 마약 밀매도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며 “특히 코카인 비범죄화는 마약 카르텔로 흘러드는 자금을 차단할 것이라 본다”고 자신했다.

최대 걸림돌은 미국의 반대다. 미국은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의 최대 거래처로, 미국에서 유통되는 코카인 90%가 콜롬비아산이다. 조너선 파이너 백악관 국가안보차관은 페트로 대통령을 취임 전 만나 “마약 합법화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넌지시 경고했다. 미 국무부 산하 국제 마약 및 법 집행국 차관보, 백악관 국가마약통제정책국 국장 등 미국 대표단도 다음 주 콜롬비아를 방문할 계획이다. 짐 크로티 전 마약단속국(DEA) 차장은 “코카인 거래 합법화가 불법 밀거래를 없애지 못할 것”이라며 “그 공백을 메울 누군가는 항상 존재한다”고 우려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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