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靑 개방·도어스테핑엔 없는 '진짜 소통'이 베를린엔 있었다

입력
2022.08.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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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일 정부 오픈하우스... 총리도 참석
장관과 'No 격식∙주제' 대화하고 정책 설명 
 노동장관 "국민과 의견 교환할 최고의 기회"




"청년들은 노인들보다 연금을 적게 받게 될 텐데, 정부가 연기금 주식 투자 등 보완책을 더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9유로 티켓' 이후엔 무슨 조치가 나오는 거죠?"(9유로 티켓: 한 달 1만2,000원만 내면 대중교통을 무제한 탈 수 있는 독일 정책으로 이달까지 시행된다.)

크리스티안 린트너 독일 연방 재무장관은 20일(현지시간) 시민들의 '폭풍 질문'에 진땀을 뺐다. 베를린에 있는 재무부 앞마당에서 열린 '정부 오픈하우스' 행사에서다.

'살아있는 건물' 공개한 독일… '청와대 개방'과 달랐다

독일 연방 정부는 20, 21일 오픈하우스를 진행했다. 독일 정부가 심혈을 기울이는 연례 행사다. 올라프 숄츠 총리가 근무하는 총리실을 비롯해 재무부·외무부 등이 문을 열었다. 집무실과 회의실 등 주요 공간이 빠짐없이 공개됐다.

독일인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비가 내렸지만 시작 시간인 오전 10시 전부터 대기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기자도 1시간 기다린 끝에 외무부 건물에 입장할 수 있었다. 오스카(21)씨는 "지난해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열리지 않아 아쉬웠다"고 했다.

의례적으로 '공간만 개방하는' 행사는 아니다. 각 부처의 정책을 설명하는 부스가 설치됐고, 전문가 정책 좌담회 등 크고 작은 행사가 700개 정도 준비됐다. 행사 안내를 맡은 소피아 칼크호프씨는 "궁금한 게 있다면 관련 부스를 방문해 얼마든 물어볼 수 있다. 민감한 주제도 상관없다"고 했다.

에너지 정책 부스를 찾아가 '글로벌 최대 현안'인 에너지 정책에 대해 물어봤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가 유럽을 압박하기 위해 천연가스 공급량을 줄이면서 독일은 탈원전 일정을 미뤘다. "에너지 정책이 후퇴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독일 정부 관계자는 "이런 혼란을 거치며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국민적 의지가 오히려 커졌다"며 "오늘 같은 대화를 통해 정책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해소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부와 국민의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거리를 좁히고, 정책 이해도를 높이는 게 오픈하우스의 주된 목표다. 행사 모토가 '민주주의로의 초대'인 이유다. 행사장엔 어린이 놀이 공간이 마련됐고, 밴드 공연도 열렸다. 푸드트럭에서 음식과 맥주를 사 먹을 수도 있었다. '정치 축제'의 현장이었다.



참석자들은 뿌듯해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로 5시간을 이동해 행사에 참석했다는 쌍둥이 캐롤리나·소피아 카란 자매는 "정부가 정말 준비를 많이 했다. 각 부처가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말하며 웃었다.

한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정책 전반에 대해 국민과 직접 소통을 거의 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를 개방했지만, 더 이상 업무 공간이 아닌 데다 정부 관계자를 전혀 만날 수 없다는 점에서 독일식 오픈하우스와 결이 한참 다르다.

사전협의 없는 '즉문즉답'… 노동장관 "정치인에게도 도움"

정부 고위관계자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오픈하우스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숄츠 총리도 21일 국민과 직접 만났다. 린트너 장관은 이틀 모두 참석했다. 린트너 장관의 만남을 지켜보니 여러모로 '파격'이었다.

우선 참가 제한이 없었다. 사전 등록할 필요 없이 누구나 입장 가능했다. '신분증을 챙기라'는 권고가 있었지만 실제 입장 땐 소지품 확인이 전부였다. 질문 기회도 현장에서 손을 들어 즉석으로 얻었다.


격식도 없었다. 맥주∙와인을 마시며 린트너 장관의 발언을 지켜보는 이들이 많았다. 바닥에 누운 참석자도 있었다. 무대 위엔 린트너 장관을 위한 의자가 마련돼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앉지 않았다. 70분 내내 무대 아래 머무르며 군중 속으로 들어가 직접 마이크를 건넸다.

질문 주제도 미리 정하지 않았다. 연금개혁, 9유로 티켓 등 논쟁적인 이슈가 많이 나왔다. 9유로 티켓을 옹호하는 입장인 리디아씨는 한국일보에 "정부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장관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린트너 장관이 "9유로 티켓은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반대편에 섰음에도 대화가 유익했다고 본 것이다.

연출된 게 없다 보니 해프닝도 많았다. 린트너 장관 발언을 방해하기 위해 구호를 외치는 이들도 있었고, 야유도 나왔다. "질문이 너무 길다"며 고함을 치기도 했다. 때로 아슬아슬했지만, 그만큼 '진짜 소통'을 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질문이 17개나 쏟아지면서 장관과의 만남은 예정된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겼다. 사인과 사진 촬영 요청에 응하느라 린트너 장관은 약 90분간 현장에 머물렀다. 대화가 끝난 뒤 린트너 장관은 긴장이 풀린 듯 맥주를 한 모금 마시기도 했다.

또 한번 한국을 떠올렸다. 한국 정부가 국민과 질의응답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그나마 극도로 정제된 형식을 취한다. 대통령, 국무총리, 장·차관 등이 '민생 행보' 또는 '간담회' 형식으로 국민들과 만나기는 하지만, 대체로 특정 주제에 국한되고 상당한 격식도 요구된다. 윤 대통령은 "상시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출근길 기자와 '도어스테핑(doorstepping∙약식회견)을 진행하고 있지만, 대화 깊이 측면에서는 아쉽다는 지적이 많다.

1년에 단 한번이라도 정부와 직접 소통을 하는 것을 독일인들은 자랑스러워했다. 교육 정책에 관심이 많아 행사를 찾았다는 로라씨는 "1년에 한 번뿐이라 아쉽지만, 이런 행사를 자주 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안다"며 "정부의 의사 결정 과정을 상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독일 정부의 평가는 어떨까. 답은 "정부 입장에서도 이롭고 유용하다"는 것이었다. 후베르투스 하일 노동부 장관은 한국일보와 만나 "오픈하우스는 정부와 시민이 현안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에 가장 좋은 행사이고, 정부는 이 취지를 살리기 위해 실로 많은 노력을 한다"며 "특히 시민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행사는 정부에게도 무척 중요하다"고 했다.

베를린 신은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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