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지내는 동안 자주 목격한 장면이 있습니다. 시내에서 빈 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었죠. 노숙인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이 공원을 돌아다니며 페트병을 줍는 장면도 여러 번 목격했어요.
빈 병 보증금제도인 판트(Pant)를 이용해 용돈을 벌려는 사람들이죠.
대학원생 지노 대비(24)씨는 “어릴 적에는 귀찮아서 빈 병을 그냥 버릴 때도 많았는데, 돈을 벌기 시작한 뒤로는 꼬박꼬박 반납하고 보증금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코펜하겐의 평범한 성인들에게도 빈 병 보증금은 꽤 챙겨 볼 만한 금액이라는 거죠.
우리나라 공병보증금 반환제도는 유리로 된 소주ㆍ맥주병 등에만 해당됩니다. 한국에선 소주병 반환시 100원, 맥주병은 130원을 받을 수 있죠.
덴마크는 어떨까요? 종류도 무척 다양하고, 금액도 상당합니다. 덴마크의 판트 보증금은 병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 A, B, C로 나뉩니다. A는 용량이 1리터보다 작은 유리병과 알루미늄 캔으로 1크로네(약 180원)입니다. B는 용량 1리터 이하의 페트병 한 개당 1.5크로네(약 270원), C는 용량 1리터 이상 페트병으로 한 개당 3크로네(약 540원)이고요. 유리ㆍ알루미늄의 보증금이 페트병보다 싼 이유는 재활용이 용이한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기자와 PD도 빈 병을 들고 숙소 근처 마트로 갔습니다. 마트 안쪽에 설치된 반환 기계에 병을 하나씩 넣으니 라벨을 스캔해 자동으로 보증금이 계산됐습니다. 큼지막한 생수병과 크고 작은 음료 페트병 4개, 맥주캔 2개, 유리병 한 개를 반납했고 12크로네(약 2,160원)를 돌려받았습니다. 사용한 병을 그대로 기계에 넣었을 뿐인데 꽤 쏠쏠하더군요.
기계에서 출력된 영수증을 들고 계산대로 가서 동전 12크로네를 손에 쥐었습니다. 현금으로 돌려받는 대신 식료품 구매 가격에서 할인을 받는 것도 가능합니다.
사실 빈 병을 반납하기 전 작은 고민이 있었어요. “페트병에 붙은 라벨은 떼어야 할까? 병을 씻어서 반납해야 할까” 등의 의문이었죠.
우리나라에서 분리배출을 했다면 ‘떼어내고, 씻는다’는 명쾌한 답을 내렸을 겁니다. 이물질 없이 깨끗해야 물질재활용이 용이하기 때문이죠. 더욱이 기자는 지난해 ‘제로웨이스트 실험실’을 연재하면서 저 두 원칙을 독자들께 여러 번 강조해 왔었고요.
덴마크에서 직접 빈 병을 반납해보며 알게 된 결론은 ‘판트 시스템에서는 소비자가 직접 라벨을 떼거나 병을 씻지 않아도 된다’였습니다. 똑같이 페트병을 재활용ㆍ재사용하는 건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요?
우선 빈 병의 라벨을 뗀다면 보증금 반환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기계가 ‘판트(Pant)’ 라는 로고를 스캔해서 병의 종류와 가격을 계산하니까요. 또 보증금 대상이 아니라서 판트 로고가 없는 병도 있다고 합니다. 다만 덴마크 판트 시스템에 등록된 상품 종류는 5만 개가 넘어 대다수가 해당한다고 보면 됩니다.
판트 시스템 운영사인 댄스크 레투어쉬스팀(Dansk Retursystem) 측은 “라벨이나 뚜껑 등을 제거하지 않아도 좋다”고 설명하는데요. 반환된 병 그대로 재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재사용 병으로 따지면 반환율은 110%라고 합니다. 일부 빈 병은 최소 한 번 이상 재사용됐다는 얘기입니다.
소비자들이 마트ㆍ슈퍼의 반환 기계를 통해 반납한 빈 병은 수거되어 공장으로 보내집니다. 소비자들이 일일이 병을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공장에서 기계를 통해 한꺼번에 분류하고 세척하기 때문이죠. 이렇게 처리된 빈 병은 기업에 재사용 병으로 되팔거나, 재활용 자재로 판매된다고 하네요.
댄스크 레투어쉬스팀은 조만간 페트병에 판트 로고를 직접 새기는 투명 로고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라벨에 로고를 새기지만 재활용이 더 쉬운 투명 페트병 중심으로 개선해 나간다는 거죠.
빈 페트병을 버릴 때면 습관적으로 물로 닦는 기자는 솔직히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지구의 한쪽(한국)에서는 플라스틱 폐기물을 세척하고 라벨을 뗀 뒤 배출을 해도 재활용이 잘 될지 장담하기 어려운데, 다른 한쪽(덴마크)에선 그냥 버려도 재활용은 물론 재사용까지 된다고 하니까요.
지난해 반환된 빈 병은 19억 개, 반환율은 93%였습니다. 2002년 판트 제도가 시작된 지 20년 만에 최고 기록이라고 하네요. 빈 병을 재활용해서 절약한 이산화탄소는 지난해만 약 21만 톤입니다. 30년생 소나무 약 3만2,000그루가 있어야 흡수되는 양입니다. 새 플라스틱을 만들기 위해 원료인 석유를 더 뽑아내는 대신, 재활용을 해서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탄소배출도 줄인 거죠.
빈 용기 보증금제는 이처럼 일회용품을 수거하고 재활용하는 데 매우 효율적입니다. 유럽연합에서만 13개 국가가 제도를 운영 중입니다. 물론 플라스틱을 아예 안 쓸 수 있다면 가장 좋겠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된다면 계속 재사용ㆍ재활용하는 게 최선이니까요.
우리나라도 올해 6월부터 일회용컵 보증금제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시행 한 달을 앞두고 6개월 뒤로 미뤄졌습니다. 제도의 대상이 되는 프랜차이즈 카페, 패스트푸드 가맹점주들이 ‘준비가 안 됐다’며 목소리를 높인 거죠.
이 제도의 법적 기반이 만들어진 건 2020년이었는데요. 실제로 따져보면 준비가 안 된 것도 맞습니다. 일회용컵 무인회수기는 아직 개발이 다 안 됐고, 보증금 라벨 구입비나 컵 처리 비용 등도 가맹점주의 몫으로 떠넘겨졌죠. 무엇보다도 정부는 보증금제 시행을 약 보름 앞두고 있던 5월 17일에야 처음으로 전국가맹점주협의회 등 소상공인 단체를 만났다고 합니다. 제도의 핵심 주체는 빼놓고 설계를 해왔던 겁니다.
사실 우리나라 일회용컵 보증금제가 가장 처음 시작된 건 2002년이었습니다. 덴마크의 판트와 똑같이 시작했던 거죠. 당시 환경부는 커피전문점 24개ㆍ패스트푸드점 7개 업체와 자발적 협약을 맺고 실험을 시작했는데요. 회수율이 30%대로 낮아 5년 만에 중단했다고 합니다.
만약 그때 정부가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반환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어땠을까요? 덴마크 역시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제도를 갖췄던 건 아닙니다. 반납 방식이나 대상 등을 고쳐가며 회수율을 높여 왔죠. 우리 정부가 20년 전, 아니 2년 전부터라도 꾸준히 노력했다면, 적어도 '1인당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량 세계 최상위권'이라는 오명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