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요절한 소설가 김소진의 문학적 젖줄은 ‘미아리 산동네’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재개발로 말끔한 초고층 아파트 단지로 변모했지만, 어린 시절 그가 살았던 성북구 길음동 일대는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은 빈민 군락지였다. 지금으로 치면 ‘반지하’처럼 사람이 살 곳이 못 되는 주거지였다.
하지만 김소진이 미아리 산동네의 기억에서 작품으로 길어 올렸던 것은 판잣집에 들러붙은 고약한 냄새 같은 가난의 주홍글씨가 아니었다. 김소진의 리얼리스트적 현미경이 조명한 것은 날품팔이, 부랑아, 도박꾼, 밥풀때기 등 비루한 밑바닥 인생들의 걸쭉한 말들과 원초적 욕망, 고된 삶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활력 같은 것들이었다. 그에게 판자촌은 질긴 생명력의 잡초들이 꿈틀대는 난장의 공간이었다.
유년기를 오롯이 판자촌에서 살았던 그에 비견할 수 없겠지만, 1990년대 후반 대학 막바지 시절에 친구와 함께 살았던 곳이 방 2칸짜리 반지하 월세방이었다. 다행인지 큰 침수를 당한 적은 없었지만, 종종 현관 문을 열어 뒀다가 쥐가 들어와 곤욕을 치른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쥐였던지라, 한번 쥐가 들어와 주방 구석으로 숨어들면 벌벌 떨어야만 했다. 쥐를 내쫓는 건 언제나 같이 사는 친구의 몫이었다.
그렇다고 그 반지하가 쥐와 얽힌 기억만 있는 곳은 아니었다. ‘IMF 사태’로 취업 한파가 닥쳐 전전긍긍하던 때였지만 친구와 함께 젊은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여러 희로애락을 겪었다. 서툴지만 처음 요리해 먹었던 매운탕도 잊을 수 없다. 반지하를 나온 이후로는 두 번 다시 느낄 수 없었던 맛이었다. 그곳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설을 써보기도 했다. 말하자면 대학 시절의 불안과 희망이 공존하던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반지하는 저렴한 주거 형태였을 뿐이지, 음습하고 퀴퀴한 지하 세계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반지하에 계급적 낙인이 생겼다면 아마도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가 더욱 극심해지고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끊어졌기 때문일 터다. 마치 이번의 반지하 침수를 예고하듯 그 현실을 블랙코미디로 꼬집은 영화 ‘기생충’은 명작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반지하의 곰팡내가 아니라 그 곰팡이 같은 인생에서 펄떡대는 인간의 냄새를 끌어내는, 다른 각도의 작품을 기대한다면 허망한 일일까.
이번 폭우로 반지하 비극이 발생하면서 주거 환경 개선의 목소리가 높다. 정책적으로 반지하를 단계적으로 없애 나가는 게 맞지만, 그 동기가 혐오의 공간을 밀어버리겠다는 게 아니길 바란다. 그것은 곧 가난한 이를 혐오하는 것에 다름없어서다. 김소진은 마지막 작품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서 미아리 산동네 재개발 논의를 다루면서 “여태껏 나를 지탱해왔던 기억, 그 기억을 지탱해온 육체인 이 산동네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략) 이 동네가 포클레인의 날카로운 삽질에 깎여가면 내 허약한 기억도 송두리째 퍼내어질 것이다”고 적었다. 누군가에겐 판잣집과 반지하의 기억이 그 정체성을 지탱하는 뿌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