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 3일 저녁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의 플라자호텔. 프런트 데스크 직원인 이비 투뎀 절센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흘째 숙박비를 내지 않은 2805호 투숙객들 때문이었다. 투숙객 명부에 '제니퍼 페어게이트'와 '로이스 페어게이트'라고 적은 남녀는 5월 31일 체크인했지만, 신용카드 한도 초과로 방값이 지불되지 않았다.
1989년 지어진 37층짜리 플라자호텔은 오슬로의 최고급 호텔이었다. 28층의 2805호는 그중에서도 가장 비싼 방이었다. 절센은 투숙객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방값 지불을 직접 독촉할 순 없었다. 2805호의 TV 화면에 "1층 프런트 데스크에 연락을 바란다"는 메시지를 수차례 띄웠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다. 2805호에 있는 누군가 TV 화면의 ‘오케이(OK)’ 버튼을 눌렀다는 것만 확인됐다.
페어게이트 부부로 추정되는 2805호 투숙객들은 방 청소도 요구하지 않았다. 호텔방문에 ‘방해하지 마시오(Do not disturb)’라는 표지를 걸어 둬 호텔 직원들이 들어가 볼 수도 없었다. 절센은 더욱 찜찜했다.
찜찜함이 불길함으로 바뀐 건 2805호 남녀가 사흘간 방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를 청소부들에게 뒤였다. 절센은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보안 요원인 에스펜 내스를 불러 2805호에 가보라고 시켰다. 투숙객들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내스가 2805호에 도착해 문을 두드린 순간 일이 커졌다. “탕!” 한 방의 짧은 총소리가 방 안에서 들렸다. 내스는 겁에 질렸다. 2805호 남녀 중 한 명이 상대방에 총을 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내스는 1층 보안 요원실로 조용히 복귀했다. 거물들과 부자들이 머무는 호텔에서 소란을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스는 다른 보안 요원들을 데리고 2805호로 돌아갔다. 방문은 안에서 이중으로 굳게 잠긴 채였다. 강제로 문을 열자마자 기분 나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방으로 튄 혈흔과 매캐한 탄약이 풍기는 악취였다. 방 안은 어두웠다. 내스의 시선이 닿은 곳에 시체 한 구가 보였다. 한 여성이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이마 가운데에 커다란 검은 구멍이 나 있었다. 총알이 머리를 관통한 흔적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총에 맞은 듯, 죽은 여성은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가 있었다.
제니퍼의 죽음은 명백한 자살처럼 보였다. 오른손엔 ‘브라우닝 9㎜’ 권총을 쥐고 있었는데, 총구와 총신에 피가 흥건했다. 방아쇠에는 제니퍼의 엄지손가락이 걸려 있었다. 이마에 총을 겨누고 엄지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듯했다.
외부에서 방으로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 창문이 열려 있었지만 28층 높이라 누군가 창문을 통해 도망쳤다고 보긴 무리였다. 권총에선 총알이 두 발 발사됐다. 한 발은 침대 베개에 명중했고, 나머지 한 발은 제니퍼의 이마를 관통했다. 경찰은 제니퍼가 자살을 단단히 결심하고 권총이 제대로 발사되는지 시험하기 위해 베개에 쏜 것이라고 추정했다.
자살로 결론 내리기엔 사건 현장은 미스터리 투성이었다. 가장 먼저 의심을 산 건 제니퍼의 오른손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권총을 꼭 쥐고 있었음에도 손 전체가 너무나 깨끗했다. 혈흔도 화약도 묻어 있지 않았다. 노르웨이의 법의학 전문가는 현지 언론인 ‘베르덴스 강’에 이렇게 말했다. “호텔 방 천장까지 피가 튀었는데 방아쇠를 당긴 손에만 피가 묻지 않은 건 매우 특이한 경우다. 더구나 브라우닝 9㎜ 권총은 발사 반동이 매우 심한 총기다. 제니퍼의 손에 긁힌 상처조차 없다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었다. 제니퍼는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구두도 신은 채였다. 옷을 갈아 입기 직전에 샤워를 했다는 사실도 경찰 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갑자기 마음을 바꿔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당시 경찰은 의아해했다.
제니퍼의 소지품도 수상했다. 누군가 그를 '이름 없는 시체'로 남기려 한 게 분명해 보였다. 여권이나 운전면허증 같은 신분증도, 집과 자동차 열쇠도 없었다. 권총의 총기 일련번호는 염산으로 지워져 있었다. 더 이상한 건 제니퍼의 옷이었다. 입은 옷과 신발 등에선 제조사와 브랜드를 보여주는 태그가 깨끗하게 제거돼 있었다. 겉옷과 신발에만 브랜드 태그가 남아 있었는데, 경찰은 태그를 떼는 게 불가능한 디자인이라서 어쩔 수 없이 남겨 둔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투숙객 명부를 다시 확인했다. 제니퍼는 스스로를 벨기에의 작은 도시인 베를렌 출신이라고 적었지만, 벨기에 경찰은 "베를렌에 제니퍼 페어게이트라는 이름의 여성은 없다"고 확인했다. 제니퍼의 이름이 가짜였던 것이다. 제니퍼가 의도적으로 신분을 숨기려 했던 정황도 확인됐다. 제니퍼는 전화로 호텔을 예약할 때는 영어를 썼고, 예약 확인 전화를 할 땐 독일어를 사용했다. 방에서 나온 지문과 치열 정보를 노르웨이와 벨기에 경찰이 조사했지만, 일치하는 인물은 없었다. 제니퍼는 그야말로 ‘유령’ 같은 존재였다.
호텔 청소부들은 제니퍼가 5월 31일 입실해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고, 6월 2일 오전 0시 34분부터 오전 8시 50분까지는 방을 나와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 시간에 제니퍼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는 폐쇄회로(CC)TV가 보편화되기 전이었다.
제니퍼가 비밀 정보기관 요원이었다는 추론이 부상했다. 제니퍼의 짐에선 총알이 32발이나 발견됐는데, 자살을 하려고 샀다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특수한 비밀 임무'를 위해 총알을 넉넉히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이어졌다.
제니퍼의 짐은 여행객답지 않았다. 트렁크에는 외투가 4벌 들어 있었지만, 하의는 없었다. 브래지어는 4개나 나왔지만 팬티는 한 장도 없었다. 여행객처럼 보이려는 목적으로 짐을 어설프게 쌌다는 뜻이었다. 제니퍼가 쥐고 있었던 브라우닝 9㎜ 권총이 특수 제작한 것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1960~1970년대산 총기 부품들을 조립해 만든 것으로,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니퍼가 살해당한 것이라면, 범인은 누구일까. 경찰은 용의자를 두 명으로 압축했다.
플라자호텔에선 아침마다 각 방에 조간 신문을 배달했다. 제니퍼의 방에선 '2816호'라고 적힌 신문이 발견됐다. 경찰은 2816호에 투숙한 인물이 제니퍼의 죽음에 관여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2816호 투숙객이 제니퍼 방에 들어갔거나, 제니퍼가 2816호에 들어갔다 나왔을 가능성이 컸다. 경찰은 2816호 투숙객을 추적했지만 신원을 알아내지 못했다.
제니퍼와 나란히 투숙객 명부에 이름을 올린 루이스 페어게이트 역시 유력한 용의자였다. 호텔 직원이 "제니퍼가 호텔에 체크인할 때 35세에서 40세 사이의 키 큰 남성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지만, 경찰은 이 남성의 정체 역시 밝혀내지 못했다. 제니퍼의 이름이 가명인 만큼, 루이스도 가짜 이름일 터였다.
사건이 미궁으로 빠지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떠오른 시나리오는 정보기관의 처형설이었다. 제니퍼가 정보 요원이거나 특정 사건의 핵심 인물이어서 조용히 '제거'됐다는 설이었다.
노르웨이 첩보기관인 ‘E14’의 수장이었던 올라 칼데거의 추론은 이랬다.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없앤 것은 전형적인 정보기관의 처형 방식이다. 노르웨이, 스웨덴, 오스트리아는 여행객이 많고 경찰의 감시가 소홀해 각국 정보 요원들의 안전지대로 통한다. 정보 요원들이 비밀 모임을 많이 하고 은밀한 사건도 많이 벌어진다. 오슬로 플라자호텔에서 보통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추론일 뿐, 제니퍼의 사망 약 30년째 '콜드케이스'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