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절친 이정재와 정우성이 영화 '헌트'로 재회했다. '태양은 없다' 이후 무려 23년 만이다. 소식이 전해진 뒤 관객들은 물론 동료 배우들의 기대감도 치솟았다. 작정하고 모아도 캐스팅이 힘든 유명 배우들이 카메오를 자청하며 이들의 만남을 지지했다. 누군가의 추억의 한 페이지를 강렬하게 장식한 정우성과 이정재인만큼 영화계 안팎의 '헌트'를 향한 관심은 대단했다.
이정재는 4년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이 작품을 연출했다. 주연 배우로서의 역할도 해야 했기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팔자에도 없던' 감독 데뷔를 하게 됐지만 영화는 제75회 칸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인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청되는 성과를 거뒀다.
오는 10일 개봉하는 '헌트'는 조직 내 숨어든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해 서로를 의심하는 안기부 요원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가 '대한민국 1호 암살 작전'이라는 거대한 사건과 직면하며 펼쳐지는 첩보 액션물이다.
다음은 이정재와의 일문일답.
-감독으로서 개봉을 앞둔 소감이 어떤가.
"아무래도 연출까지 겸한 건 처음이긴 해서 더 떨리거나 긴장될 줄 알았는데 비슷한 거 같다. 왜 비슷한지 요 며칠 생각해 보니까 작업을 다 끝내고 손에서 떠났다고 생각이 드니까, 판단에 대한 몫은 관객에 돌아갔다고 생각이 드는 게 (배우로서 개봉할 때와) 기분이 비슷하다."
-영화가 공개된 후 호평이 많았다. 또 연출을 할 생각인지.
"연기를 오래 했고 앞으로도 연기에 열중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연출만 하는 사람이라면 '다음 건 뭐로 하지' 하며 소재 고민이 많을 거 같다. 내 주변 친한 감독들이 많으니까 그런 고민을 항상 듣는다. 나는 연기를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이지, 차기 연출작 고민이 별로 없다.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 하하."
-뭐가 제일 힘들었나.
"제일 힘든 건 체력적인 부분이다. 연기자는 자기가 나오는 분량을 촬영하면 할 일을 다 했다고 보는데 연출을 하다 보니 더 많은 회의가 필요했다. 그 회의 안에서 결정하려면 고민도 있어야 하고 맞는지 아닌지 체크도 해야 하더라. 개인 생활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일이 많다 보니까 책임감도 많아지고, 좋은 결정을 내려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겠단 생각으로 이어져 열심히 했다. 나중엔 체력이 버티지 못할 정도까지 되더라."
-시나리오도 직접 썼는데 어땠나.
"시나리오 쓸 때도 많이 힘들었다. 처음 쓰는 거고 감독님이 잘 섭외가 되어서 상의를 하면서 프로듀서 입장으로 하는 건 가능할 거 같았는데, 연출자가 선정되지 않다 보니까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까지 해야 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이 결정이 맞는 건지 스스로 고민하는 불안감이 처음 느껴보는 경험이었다."
-지금도 마음고생이 느껴진다.
"스트레스가 많았다. 의견이 안 맞을 땐 혼돈도 오고 더 괴롭더라. 결정을 기다리는 수많은 시선들을 견뎌내야 하고 결정 후엔 힘을 모아 끌고 가야 하는 추진력이 있어야 했다. 옳은 결정이었다는 설득도 논리가 있어야 하다 보니까 신경써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시나리오의 각색 과정도 궁금하다.
"처음 판권 구매했을 때는 제목이 '남산'이었다. 이 주제는 나와는 맞지 않으니 주제를 바꿔야겠다는 얘길 먼저 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주제 잡는게 어렵더라. 여러 주제를 놓고 고민했다. 많은 사람들과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잡아야 흥미롭게 재밌게 봐줄 수 있는 거니까. 그 기간이 제일 오래 걸렸다. 신념에 대한 이야기로 해야겠다고 결정한 뒤엔 내가 가진 신념이 만약 옳다면 다행이지만 그릇된 신념이면 이걸 어떻게 바꿀 것인지, 바꾼다면 그 이후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할 건지 고민했다."
-캐릭터도 변화한 부분들이 있나.
"'남산'에선 평호가 원톱이었다. 이 정도 대규모 제작비의 영화는 원톱으로는 재밌게 보기 쉽지 않다. 멀티캐스팅으로 해서 다른 색깔의 연기자들이 더 등장을 해줘야 재밌다. 멀티캐스팅이 쉽지 않을 거 같아 투톱 구조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인물을 키우면서 주변 인물 설정을 다시 했다. 있는 건 다르게 바꾸고 없는 설정도 넣어서 풍성해 보이게 했다. 인물의 관계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 템포가 많이 바뀌었다."
-투톱 장르물을 잘 살리는 게 쉽지 않은데 노력이 느껴진다.
"시나리오 쓸 때 스파이 장르물이라는 특성을 잘 살리는 게 어렵더라. 게다가 투톱 구조가 짜기 어렵다. 비중이 51 대 49만 되도 캐스팅이 안 된다. (적은 비중의) 상대가 캐스팅 안 되는 거다. 일을 해보면 그런 경향이 있다. 더구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같이 나는 굉장히 이상한 놈이고 정민 형은 부성애가 있어서 아이를 구하러 가는, 색이 완전 다른 캐릭터면 할 수 있지만 ('헌트'는) 안기부 내에 근무하는 양복 입은 요원들이라서 비슷해 보일 수 있어서 상황적으로 더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는 인물이 생길 수 있다. 그런 부분들을 계속 신경썼다."
-80년대를 그린 팩션 영화다.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는데, 조율은 어떻게 했나.
"아웅산 사건은 원래 시나리오에 있었다. 아웅산이라는 명칭이 들어가 있으면서 사실적으로 묘사가 돼있어서 처음부터 100%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국이란 설정으로 바꾸면서 픽션이 많이 들어갔다.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만 가져오면서 상당 부분을 영화적으로 표현했다."
-내면의 혼란을 어떻게 타파했나.
"내 성격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끝까지 해보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다. 왜 안 될지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니까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 것들이 나열이 되면서 준비해야 할 거나 수정해야 할 것들을 하나씩 개선해나가는 방식으로 했다. 하나씩 채워져 나가는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이걸 발전시키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더 부여잡고 있는 거다. 하나를 만들어놓고 이거보다 좋은 걸 고민해서 바꿔 끼우는 그런 식으로 작업했다."
-정우성 배우가 출연을 여러번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배우를 설득하는 건 시나리오로 해야 한다. 처음에 얼마나 허술했겠나. 우성씨가 좀 더 고쳐보라 했고, 나도 스케줄이 안 되면 다른 배우에게 주겠다고 했다. 내 생각에도 시나리오가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수정되면 보여주고 또 보여주고 그랬다. 4년간 네 번 거절한 얘기를 왜 하냐면 '친하니까 둘이 했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있어서 아니라고 명확히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고르고 작품에 임하고 촬영을 할 때는 철저하게 프로 정신으로 하지, 친분 때문에 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다. 이 기회에 말씀드리는 거다. 우성씨도 철저하게 팬들이 있고 본인이 가고자 하는 연기자 인생의 방향이 있는데 친분 때문에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특별출연한 배우들도 인상적이더라.
"우성씨랑 내가 한 스크린에 나온다고 하니 주변 배우들이 '진짜 오래 기다렸다. 뭐 도와줄 거 없나' 하더라. 서로 말씀해 주니까 너무 고마웠다. 그 바쁜 배우들이 본인 스케줄 소화하기에도 타이트한테 다 지방으로 와서 날짜를 다 맞춰서 촬영하게 됐는데 고맙더라. 현장에서도 너무 즐겁게 찍었다. 다들 아는 사람이니까 밥만 먹어도 재밌는데 촬영하고 그러니까 그 시간이 잊지 못할 시간이 됐다. 모든 배우들이 함께 의미있게 나와줬다는 자체가 믿을 수 없는 동료애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특별출연이 너무 강렬해서 몰입도가 깨지면 안되니 그 부분도 고민했을 것 같은데.
"황정민 선배와 이성민 선배가 맡은 캐릭터는 부탁을 드려서라도 친한 배우들이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시나리오를 좀 더 바꿔서 강렬해 보이게끔 수정을 했다. 워낙 강렬한 분들이기 때문에 이 두 명만 나와도 영화가 시선을 많이 뺏기는 건가 생각했는데, 다른 동료들이 다 나와준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안 된다고 했다. 어디다가 넣어야 할지 모르겠더라. 집중해서 봐야 하는 긴장감을 놓치면 안 되는데 카메오가 계속 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재덕 대표님이 '다 나와준다고 하는데 왜 안 된다고 하냐. 다 나오게 할 수 있는 고민을 해달라' 하더라. 그래서 고민 끝에 요원들로 설정을 했다."
-힘든 길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너무 좋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제일 큰 건 정우성을 설득해서 함께 한 것이다. 제일 잘한 일이다. '이 정도 시나리오면 한번 하겠다. 나머지 수정해야 할 것들은 수정해서 하자'고 의기투합해 준 게 제일 고맙다. 그게 첫 단추를 잘 꿰었다고 생각을 한다. 그 다음 한재덕 대표가 많은 훌륭한 스태프들을 조율해서 함께 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도 큰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개봉을 앞두고 관객들이 어떻게 봐줄지 더 큰 숙제가 남아있지만,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좋은 스태프들을 만나야 하는 건 최고로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다. 그 모든 것들이 이뤄지기 위해선 우성씨가 합류하느냐 안 하느냐가 가장 컸다. 한 스크린에 나온다는 것을 영화계에 있는 분들이 이토록 응원해 줄 거라 생각 못 했다. 좋은 분들이 기쁜 마음으로 많이들 참여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