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는 안락사 천국일까... 존엄한 죽음 위한 '편도 티켓'의 딜레마

입력
2022.08.2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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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여성, 바젤서 존엄사... '죽을 권리' 질문
동행자, 한국일보 인터뷰서 "죽기 전 확신 차있었다"
스위스서조차 쉽지만은 않아... "합법화 필요 이유"


고(故) 엘레나 알타미라 여사의 마지막 편지
"안녕하세요. 이탈리아인 엘레나입니다. 지금 저는 스위스 바젤에 있습니다. 지난해 폐암 진단을 받았어요. 이미 가망이 없는 상태였죠. 두 가지 길이 보였어요. 남은 몇 달 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긴' 길, 그리고 스위스에서 존엄사를 통해 선택할 수 있는 '짧은' 길. 저는 후자를 택했어요. 이 영상을 통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냅니다. 차오(안녕)."

엘레나씨가 남긴 영상 편지가 이탈리아를 흔들었다. 엘레나씨는 존엄사(안락사)를 위해 스위스 바젤로 향했다. 이달 2일 6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누구도 정답을 말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스위스행은 최선이었을까, 고통스러운 삶도 죽음보다 나은 것 아닌가, 삶을 끝맺을 권리가 개인에게 있나...

한국일보는 스위스의 유력한 존엄사 조력단체인 '디그니타스'와 '엑시트', 그리고 엘레나씨의 마지막 여행에 동행한 이탈리아 활동가 마르코 카파토를 인터뷰했다. '잘 사는 것(웰빙)'과 '잘 죽는 것(웰다잉)'을 다 고민해야 하는 시대임에도 한국에선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자 금단의 영역인 존엄사에 대해 묻기 위해서다.

외국인에게도 열린 존엄사... 경험·인프라 풍부

이탈리아에서는 원칙적으로 존엄사가 불법이다. '기계에 의존해 삶을 유지하는 상태' 같은 특수 사례에만 존엄사가 제한적으로 인정된다.

존엄사를 결심한 엘레나씨가 가장 먼저 떠올린 나라는 스위스였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존엄사를 합법화한 다른 유럽 국가들도 있지만, 스위스에선 1942년부터 외국인에게 존엄사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타인의 존엄사를 도운 스위스 조력단체들을 외국인도 쉽게 접촉할 수 있다. 스위스의 '존엄사 제도'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것은 물론이다.

조력단체들이 각각 집계하는 데다 죽음이 내밀한 영역이어서 스위스의 외국인 존엄사 공식 통계는 없다. 2020년 스위스에서 집행된 존엄사는 내·외국인을 합해 1,300건 정도로 추산된다. 엑시트와 디그니타스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스위스로의 마지막 여행'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은 지난 3월 "스위스에서 존엄사하고 싶다"고 선언했다. 2018년 당시 호주 최고령 과학자였던 104세 데이비드 구달 교수는 평소 즐겨듣던 베토벤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를 배경으로 스위스에서 영면에 들었다.

'편도 티켓'을 끊고 스위스로 가는 외국인 존엄사 희망자들이 거치는 대략적인 절차는 이렇다. 조력단체와 상담을 통해 존엄사 가능 여부를 확인한 뒤 → 존엄사를 실행할 일정을 잠정 확정한다 → 해당 날짜에 맞춰 스위스에 도착해 조력단체 및 의사와의 추가 면담을 거치고 → 존엄사 일정을 최종적으로 확정한다 → 몇분 안에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약품 '펜토바르비탈'을 처방받은 뒤 → 환자가 '직접' 투약해 사망한다.


'천국'이라기엔... '낯선 곳'에서의 '쓸쓸한 죽음'

스위스라는 선택지는 과연 '무결한 최선'일까. 취재 결과, 그렇지는 않았다.

고향 혹은 조국이 아닌 곳에서 세상과 작별해야 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다고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엘레나씨도 "내 집에 있는 내 침대에서 남편과 딸의 손을 꼭 잡고 삶을 끝낼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불행하게도 그게 불가능했다"고 토로했다.

스위스라고 하면 알프스의 아름다운 풍광이 떠오르겠지만, 그곳에서의 죽음마저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숨을 거두는 장소는 대체로 스위스 병원 한구석의 작은 침대 위다(스위스인만 병원 아닌 집 등에서 존엄사할 수 있다). 물약을 마시면 2~5분 안에 사망한다고 하는데, 그 전까지 존엄사할 자격이 있는지를 스위스 정부에 계속 증명해야 한다. 삶을 조용히 돌아보는 시간이 여유롭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또 다른 비극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눈감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존엄사를 위한 여행을 함께하는 가족들은 스위스 혹은 모국 법에 의해 자살 방조 또는 자살 선동 혐의를 받을 위험에 노출된다.

엘레나씨 역시 가족을 동반하지 못했다. 유럽의회 이탈리아 의원 출신인 존엄사 합법화 활동가 카파토씨에게 동행을 요청한 이유다. 카파토씨는 5년 전 존엄사를 원하는 남성(故 파비아노 안토니아니)과 스위스에 동행했다가 이탈리아에서 기소된 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카파토씨는 엘레나씨의 죽음을 방조한 혐의로 또다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이번엔 징역 12년의 중형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카파토씨가 아니었다면 엘레나씨 가족이 짊어질 뻔했던 부담이다.

카파토씨에게 엘레나씨의 마지막 모습을 들었다. "의사 면담 등 모든 절차를 마치고, 투약하기 직전에 남편이 스위스에 도착했다. 딸은 스위스로 오지 못했다. 이탈리아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들어야 했다." 카파토씨는 존엄사 합법화라는 '대의'를 위해 활동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가족의 존엄사를 지켜보는 건 일반인들이 짊어지기엔 너무 무거운 짐이라고 했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영국 사우스포트에 사는 앤드루 형제는 "신경계 퇴행성 질환 인 헌팅턴병을 10년째 앓던 어머니의 존엄사에 1만 파운드를 썼다"고 지난 5월 현지 언론 리버풀 에코에 말했다. 환산하면 약 1,600만 원이다. 한국에서 스위스까지 가려면 더 많은 금액이 들 것이다. 스위스에서 존엄사를 택했다고 알려진 한국인은 지금까지 2명이다.

체류 비용이 더 오를 수도 있다. 최근 스위스는 '외국인이 존엄사를 최종 승인받으려면 2주 동안 2회 이상 현지 의사와 상담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을 신설하려고 하고 있다. '더 오랜 체류'는 '더 많은 비용'을 뜻한다.

디그니타스는 "최초 가입비(200스위스프랑), 동반 자살 승인 비용(4,000스위스프랑), 진찰비(1,000스위스프랑), 도우미 고용·장소대여비(2,500스위스프랑), 장례 비용(2,500스위스프랑), 기타 비용(500스위스프랑) 등을 합해 최소 1만700스위스프랑(1,477만 원)이 필요하다고 홈페이지에서 안내하고 있다.

투약 직전 포기하는 사례도 있다. 스위스 언론 스위스인포는 이런 사연을 소개했다. "어릴 적부터 신경마비를 앓던 일본인 아이나씨는 2021년 존엄사 확정 날짜를 받고 스위스로 날아갔다. 30세였다. 그렇게 소원했던 펜토바르비탈을 손에 쥐었지만, 끝내 마시지 못했다. 결국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사망 이후에는 스위스 당국의 수사를 받아야 한다. 이른바 '정상적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겹겹의 어려움 탓에 스위스의 조력단체들은 "우리의 쓸모가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디그니타스 관계자는 "타국에서 외롭게 삶을 끝내길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라며 "우리의 목표는 '죽음을 위한 관광'이 사라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을 내가 맺을 권리란

'죽을 권리'가 '인권'에 속하는 영역이라는 인식이 커지면서 국제사회의 존엄사 합법화 목소리도 더욱 커지고 있다.

다시 카파토씨의 말. "엘레나씨는 죽음을 앞두고 울지 않았다. 미칠 것 같은 육체적 고통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비행기에선 자신이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했다. 특히 '마지막 순간'을 온전히 자신의 통제하에 두는 게 맞는다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최근 존엄사 논의에 다시 불이 붙었다.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보건복지부 장관 소속 '존엄사 심사위원회'를 거친 뒤 의사가 존엄사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조력존엄사법안을 얼마 전 발의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다. 여론도 합법화를 해야 한다는 쪽에 기울어 있다. 한국리서치가 지난달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82%가 존엄사에 찬성했다.

반론도 만만치는 않다. "의사에게 자살을 위탁하는 것"이라는 비판과, "생명 경시 풍조를 조장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안규백 의원실이 이달 24일 국회에서 주최한 토론회에서도 찬반 대립이 확인됐다. "말기 환자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은 주관적인데 존엄사 허용의 명확한 기준을 마련할 수 있느냐"(김현섭 서울대 철학과 교수), "조력존엄사법이라는 이름으로 의사조력자살을 합법화하는 것은 자살을 포장하는 것"(박은호 천주교 서울대교구 가톨릭생명윤리연구소장) 등 발언이 나왔다.

섣불리 존엄사를 인정하는 것보다 2018년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 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수 있도록 사전에 결정해두는 제도)을 제대로 안착시키고, 환자들이 죽음을 생각하지 않도록 지원·보장을 강화하는 게 우선이라는 지적도 있다.

논의가 더 깊어지면, 어디까지 존엄사를 허용해야 하느냐와 같은 문제를 푸는 데도 진통을 겪을 것이다. 존엄사를 허용하는 캐나다에서도 최근 "만성질환 때문에 돈을 벌지 못하고 사회에서 멸시를 받고 있어서 죽기를 원한다"며 신청한 존엄사가 승인되며 논란이 됐다. "결국 존엄사가 사회적 약자의 죽음을 방치하는 제도로 전락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무엇보다 컸다.

스위스에서도 존엄사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관련 소송도 잇따른다. 엑시트 관계자는 이렇게 물었다. "가망 없는 가족의 병원비 때문에 나머지 가족들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할까요? 고령화 사회에서는 더 많은 사례가 나올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또다시 존엄사 합법화 논의를 앞둔 한국에 던지는 질문이었다.

베를린 신은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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