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아침마다 작은 전쟁을 벌인다. 알록달록한 우산ㆍ우비ㆍ장화를 두른 채 유치원을 가고픈 곰돌이반 어린이와 뜯어말리는 나의 전투 말이다. 별렀던 노란 우비를 못 입는 이유를 아이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렇게 예쁜데. 스스로 입을 수도 있는데. “엄마! 비 오면 입을 수 있다며. 그러다 코 길어져!”
피노키오가 된 엄마도 변명은 있다. 비 내리는 유치원 현관에서 스스로 우산을 접어 물기를 털어 정돈하고 우비ㆍ장화까지 스스로 수습할 아이는 거의 없다. 장비가 늘어날수록 들이닥쳐 신발을 벗겠다고 저마다 끙끙대는 아이들을 수습하느라 여러 선생님의 진땀은 비보다 더 한 기세로 등줄기를 적실 게 분명하다. 아이의 설렘은 미안하지만 뜯어말리는 수밖에 없는 계획인 셈이다.
투박한 어른 우산 하나만 나눠 쓰고, 입이 삐죽 나온 아이를 유치원 버스에 올려 태운 뒤 빗속 걸음을 재촉하며 생각했다. 현명한 이들에겐 익히 알려진 명제, 어리숙한 나는 몸으로 겪은 뒤에나 새롭게 배운 사실들을. 인간의 생활이란 이토록 오래 누군가의 보살핌 속에서만 영위할 수 있구나. 어떤 동물들은 태어나 혼자 껑충껑충 잘도 뛰어다니던데. 인간은 신발 하나도 혼자 능수능란하게 신고 벗는 데 6, 7년이나 걸린다.
물론 아이와 보호자가 치르는 숱한 전쟁을 생각하면 우산이나 장화 전쟁은 아주 귀여운 수준이다. 그래서였을까. 안 그래도 일상이 전쟁인 또래 부모들에게 ‘만 5세 조기입학’ 논란은 하나의 ‘호러’였다. 여름이라 특별히 준비한 것도 아닐 텐데 ‘악’ 소리가 빗발쳤다.
교과서에 남을 장면이 여럿 나왔다. 단락명은 ‘현장과 정책의 몰이해’쯤 되겠다. 모두에 대한 여론 수렴을 가볍게 건너 뛴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입만 열면 어린이집 누리과정, 학제 개편 대책, 돌봄 공백 부작용, 학교 현장 실태를 전혀 모르는 사람의 말을 쏟아냈다. 안다면 할 수 없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교육청ㆍ학교ㆍ교원ㆍ부모가 한 목소리로 즉시 극한 거부반응을 보인 이유는 크게 하나였다. 15개월 연령 차가 나는 만 5, 6세 아이들을 한 학교 교실에 밀어 넣으면 어떤 전쟁터가 펼쳐질지 모두 훤히 알았기 때문이다. 박 장관은 한 간담회에서 “제가 화두를 던지지 않았더라면 학부모들 사연을 들을 수 있었겠냐”는 발언을 내놨지만, 모두가 아는 데다 국책연구기관까지 보고한 부작용을 모른 건 자신뿐이었다. 난데 없는 외고 폐지 발표까지 내놓은 그는 결국 8일 자진 사퇴의사를 밝혔다.
어린이의 일상에는 교육보다 보육이 절실한 순간들이 많다. 무 자르듯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육에 더 최적화된 공간에서는 보호되기 어려운 아이의 존엄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예기치 못한 배변 실수를 감싸주고, 제 힘으로 한다며 단추와 씨름할 때 기다려주고, 약한 아이가 놀림 받지 않게 매사를 모두 눈여겨보는 일은 15개월 차이의 아이들 수십 명이 밀려 들어갈 학교 교실에 최적화된 일은 분명 아니다. 아이에게도 교원에게도 못할 짓일 뿐이다. 유치원 하원인 오후 4시가 아닌 학교 하교인 낮 12시부터 귀가해 보호자 퇴근 전까지 여러 기관을 전전하는 것 역시 아이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먼저 학교와 학제가 모두 바뀐다면 모를까.
나이가 어릴수록 아이에게 절실한 건 많이 가르쳐주려는 어른이 아니라 그저 무해하게 곁에 존재하는 우산 같은 어른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더 나은 교육을 각오하면서도 정작 이 차이를 모르는 관료와 당국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장맛비 속에서 호러물이라도 본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