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금속활자가 고려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조선이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국가였다는 점은 세간의 관심에서 밀려나 있다. 조선왕조는 기록된 경우만 따져도 500여 년 동안 수십 차례 금속활자를 만들었고, 그때마다 적게 잡아도 10만 자 정도를 제작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으로 일했던 금속활자 전문가인 이재정은 신간 ‘활자본색’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낮았던 조선 금속활자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서양 금속활자처럼 정보 대중화와 근대의 탄생에 기여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금속활자 역시 한반도 역사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고, 그 가치를 제대로 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는 지난해 6월 서울 인사동의 유적 발굴조사 현장에서 항아리에 담긴 채 출토된 조선 전기 금속활자들에서 출발한다. 도심 한복판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쏟아지면서 학계는 물론,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집중됐다. 무엇보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서체와 제작 방법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금속활자로 알려진 ‘갑인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전까지는 갑인자로 인쇄한 서책이 존재할 뿐, 갑인자 실물은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저자는 정조가 100만 자가 넘는 활자를 만들었다는 기록부터 조정의 압박에도 민간이 활자를 만들어 낸 사연까지 조선 금속활자에 얽힌 다양한 기록과 이야기를 전하며 강조한다. “이제 명확해졌다. 적어도 19세기 이전에 그렇게 많은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나라도, 그때 만든 활자들이 남아있는 곳도 한국뿐이다. 게다가 이제 한글 활자가 다수 출토되었고 갑인자도 확인되었으니 그 사실과 의미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