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 수렴 없이 지름길로 가려던 교육부가 제대로 체면을 구겼다. 교육계와 학부모들의 거센 반발로,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만 5세로 1년 앞당기는 학제 개편안을 발표한 지 불과 나흘 만에 윤석열 대통령으로부터 "신속한 공론화에 나서라"는 지시를 받으면서다. 결국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도 뒤늦게 "국민적 합의가 없다면 정책을 폐기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2일 교육부에 따르면 박순애 부총리는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교육시민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전국학부모단체연합 등 학부모 단체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박 부총리는 이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교육과 돌봄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안전한 성장을 도모하고 부모 부담을 경감시켜 보자는 것이 목표"라며 "(학제개편은) 이런 목표 달성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했다.이어 "지속적인 사회적 논의와 공론화를 거쳐 구체적인 추진 방향을 결정해 나갈 예정"이라며 "전문가 의견을 듣고 시도교육청과도 긴밀하게 협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간담회에선 학부모 대표들의 정책 철회 요구가 쏟아졌다. 박은경 평등교육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대표는 "이 발표 하나에 당장 사교육계가 (사교육) 선전을 하는데 어떻게 감히 공교육(강화)을 입에 담느냐"며 "정책을 철회하는 것이 맞다. (박 부총리에 대한) 사퇴 운동까지 갈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박 부총리는 "(정책이) 전달되고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학부모들께 충분히 (목표가) 전달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송구하게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정부가 한발 물러섰지만, 의견 수렴 없이 졸속으로 발표한 학제 개편안에 대한 비판은 계속 쏟아지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고 나라의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 정책을 대통령의 지시 한마디에 일방적으로 추진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고, 이은주 정의당 원내대표는 "의견 수렴을 하겠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시나리오까지 밝혀놓고 이제와서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이 '신속한 공론화'를 지시함에 따라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국교위는 정권에 따라 뒤바뀌는 교육 정책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중립적 입장에서 중장기 교육 프로젝트를 논의하고자 만들어진 기구다. 교육계의 반발이 이어지자 앞서 박 부총리도 국교위와 함께 사회적 논의를 거쳐 학제 개편안의 최종 추진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국교위법에 따르면 국교위는 '중장기 정책방향, 학제·교원정책·대입정책·학급당 적정 학생 수 등' 10년마다 국가교육발전계획을 수립하도록 명시돼 있다. 때문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학제 개편은 국교위에서 논의한 뒤 교육부가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번 개편안은 앞뒤가 바뀌어 교육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해 거센 반발을 샀다.
문제는 여전히 국교위가 언제 출범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점이다. 박 부총리는 전날 기자들과 만나 "국교위가 늦어도 9월 중에는 구성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아직 21명의 위원 중 당연직인 교육부 차관과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회장을 제외하면 1곳에서만 추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곽민욱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전문위원은 "국교위는 의견 수렴을 통해 정책의 필요 여부부터 결정하는 기관인데, 교육부가 국교위와 '협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국교위 역할에 대한 현 정부의 이해도가 얼마나 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하루빨리 위원 구성을 마무리해 교육 개혁 논의가 국교위 중심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