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도쿄의 오카노 공업. 아프지 않은 주사기를 개발한 기술력으로 연 매출 100억 원의 이 알짜 기업이 돌연 폐업을 선언했다. 가업을 이을 후계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업주의 두 딸은 애초에 관심이 없었고, 잠시 관심을 보이던 손자마저 '금속가공업의 수요가 불확실하다'며 후계자를 포기했다.
#. 일본 경제잡지 도요게이자이는 지난달 일본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한국에 추월당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구매력 기준 1인당 GDP는 몇 년 전 한국이 앞섰으나, 엔화 가치가 달러당 140엔을 넘어서면 명목 환율에서도 한일 역전이 일어난다고 전했다. 또 "이는 단순한 숫자 이야기가 아니며, 일본이 실제로 가난해졌고 일본 산업이 약해졌다는 걸 뜻한다"라고 덧붙였다.
일본은 1990년부터 거품경제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후 ‘잃어버린 10년, 20년’으로 경기침체가 이어졌으나, 2012년 출범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의 아베노믹스가 효과를 나타내며 주식, 부동산, 취업률이 상승세로 안착하고, 2017년에는 장기 불황 터널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도 나왔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일본 경기는 다시 침체에 빠져들었고 급기야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엄살처럼 들리던 일본 전문가의 한일 경제력 역전 전망도 이제는 일본 내부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2012년 4월 일본 경제단체연합 산하 21세기정책연구소는 '글로벌 JAPAN–2050년 예측과 종합전략' 보고서에서 “잃어버린 20년 상황이 계속된다면 2030년경에는 한국에 추월당한다”라는 예측 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10년이 흐른 지난해 8월 한국은 국가경쟁력 종합순위 및 다수의 경제지표에서 일본을 넘어섰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 대학원(IMD)과 세계경영포럼(WEF)이 발표하는 국가경쟁력 평가와 S&P, 무디스 등 3대 국제 신용평가사의 국가신용등급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서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한국이 일본을 앞지르기 시작한 걸까?
제2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한국전쟁 특수로 일본 경제는 급성장했고 1980년대 일본 전자산업은 최대 번성기를 누렸다. 미국, 영국, 프랑스의 최고급 백화점 가전 매장의 중앙을 소니를 비롯한 일본 기업이 차지했다. NEC, 도시바, 히타치 등 일본 기업들이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나눠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전자산업 또한 거품경제 붕괴와 함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시기에 거듭난 의사결정 실패로 세계 시장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특히, 고가의 LCD를 주력 제품으로 의지하던 샤프는 한국 기업의 공세에 밀려 경영난에 처한 뒤 2016년에는 대만 기업 폭스콘에 인수됐다. 1986년부터 10년간 이어진 미·일 반도체 협정의 영향으로 일본 반도체 산업은 쇠퇴기로 접어들었고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일본의 빈자리를 차지한 건 한국 제품들이다. 가전에서는 LG전자와 삼성전자가, 반도체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1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 기업의 몰락은 일본 사회 전반의 경쟁회피 성향 때문이다. 세계 시장은 급변하고 경쟁은 치열해지는데, 일본 내부에서는 오히려 경쟁은 줄어들고 현재에 안주하는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 문부과학성이 지난 5월 발표한 대졸자 취업률은 95.8%에 달한다. 취업 재수가 보편화한 한국 입장에서는 더없이 부러운 상황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일본의 취업률이 높아진 건 지속적 인구 감소와 2010년 전후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태어난 ‘단카이 세대’의 본격적 은퇴에서 비롯된 구조적 인력 부족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학생들은 학업에 열의가 없다. 일본 대학생은 졸업을 앞둔 학년의 1학기 초에 취업 제안을 받는데, 인력난으로 5, 6개 기업에서 내정 받은 다수 학생들은 학업에 정진할 동기가 없다는 것이다. 과도한 경쟁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내부 경쟁이 줄어들면서, 조직의 경쟁력도 약하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쯤되자 과거 해외 기업을 사들이던 일본 경제가 오히려 알짜 기업을 매각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런던 증권거래소(LSEG) 산하 리피니티브(Refinitiv)에 따르면 올 상반기 미국과 한국 등 해외 기업의 일본 기업 인수액은 1조3,000억 엔으로 1년 전보다 34%나 늘었다. 반면 일본 자본이 해외 기업을 인수한 규모는 46%나 줄었다.
일본이 여전히 경제 대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 중 하나가 고도의 기술력을 가진 강한 중소기업이다. 전후 일본 재벌이 해체되는 시기(1948년)에 일본 정부는 중소기업청을 설치하여 중소기업을 본격 육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도 성장기에 대기업은 우수 부품 확보를 위해 중소기업과 돈독한 협력관계를 구축, 공동으로 기술개발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중소기업이 일본 경쟁력의 원천이 됐는데, 기업 문화도 한 몫을 차지했다.
일본에는 예전부터 장인을 존중하고 가업을 승계하는 문화가 있었다. 이러한 문화가 이어져 중소기업은 가업 승계를 통해 노하우를 전수하고 기술을 축적하여 경쟁력을 강화해왔다. 하지만 최근 오카노 공업의 사례처럼 가업 승계에 문제가 발생했다. 일본의 시장조사기관인 제국 데이터뱅크는 "전국기업 ‘후계자 부재율’ 동향 조사"에서 지방 중소기업들이 후계자 문제로 흑자 폐업하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다고 발표했다. 2021년 1~10월까지 후계자 문제로 도산한 기업이 369개에 달한다는 것이다. 일본 중소기업청이 2017년 7월부터 ‘중소기업 사업승계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지원하고 있으나, 상황은 오히려 심각해지고 있다.
최근 일본 경제는 내·외부 요인에 의한 국가경쟁력 저하로 낮은 성장률을 보인다. 반면 한국은 일본보다 높은 성장률을 보이며 뒤쫓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연구개발비(R&D) 투자액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다. 특히 소재·부품 분야의 국제 경쟁력은 여전히 우수하다. 한국의 대일 적자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일본 소재와 부품에 대한 의존도는 여전히 우리 경제를 위협하는 수준이다. 2019년 7월, 아베 정권의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규제 강화는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규제 강화의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있으나, 목적은 한국의 주력산업인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 공급망에서 일본의 지위를 이용하여 한국 정부에 압박을 주고자 함이 분명했다. 즉 한국 경제에 일본이 미치는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경제는 일본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한국 경제가 일본을 넘어서려면 우선 핵심 소재·부품의 대일 의존도를 낮추는 게 핵심이다. 일본이 우리 주력산업의 공급망을 흔들기 위해 위협했으나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해 없이 지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해당 분야의 의존도를 낮추는 맞대응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대일 우호 협력관계를 잘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과 일본은 산업구조상 다차원적으로 상호 큰 영향을 주고 있어, 단절할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오랜 기간 형성된 공급망을 억지로 단절하고 바꾸려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경쟁력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따라서 일본과의 적절한 협력관계는 한국 경제가 궁극적으로 일본을 넘어 더 큰 성장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니혼(日本)대학교 상학연구과 경영전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주일 한국대사관 경제과에서 전문연구원으로 일본 경제와 산업 분석을 담당했다. 2014년부터 산업연구원에서 일본 산업을 비롯하여 신산업, 특히 반도체산업 분야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