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재정’을 기치로 내건 윤석열 정부의 출범 초기 행보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지점이 많다. 14조 원 규모 1차 추가경정예산 때는 재원이 모자란다며 11조 원 넘게 적자국채를 찍자고 했던 기획재정부가 무슨 계산인지 정권이 바뀌자 불과 3개월 뒤 2차 추경 때는 53조 원이 초과세수로 생긴다고 말을 바꿨다. 덕분에 윤석열 ‘긴축’ 정부는 출발부터 화끈하게 돈을 풀며 시작했다.
대선공약 실현에 임기 중 209조 원이 든다면서도 정부는 법인세와 종합부동산세, 소득세 등 세금을 전방위로 깎아 주겠다고 한다. 작년과 올해 초과세수의 주축이었던 법인세와 재산세 수입을 대폭 줄여도 재정건전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식이다. 여기에 윤 대통령은 부처 업무보고 때마다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조기 개통, 병사 월급 200만 원 추진 등 ‘돈 드는’ 주문을 하고 있다.
‘더 쓰면서 아끼겠다’는 마술의 근저에는 정부의 예산지출 구조조정이 있다. 추경호 부총리가 공언했던 “역대 최고 수준의 강력한 지출 구조조정”이다. 윤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매년 재량지출의 10%(약 30조 원)씩을 절감하면 5년간 150조 원을 아낄 수 있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지출 구조조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대 모든 정부가 예산안 편성 때마다 “재량지출 10% 구조조정”을 매뉴얼처럼 되뇌었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윤 정부의 첫 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재부가 국회에 제출한 올해 2차 추경안에는 ‘7조 원 지출 구조조정’ 항목들이 포함됐다. 하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이는 기존 예산을 없애거나 줄이는, 진정한 의미의 구조조정과 거리가 멀다.
1조6,000억 원 규모 국방예산 구조조정은 대부분 예산 지출시기를 내년 이후로 미룬 것이다. 항공장비 유지 예산 1,006억 원, 해상작전헬기 예산 526억 원 등이 깎였지만 이는 구조조정이 아니라 “내년 이후 쓰자”는 돈이다.
상황을 보니 올해 안에 소진하지 못할 것 같은 예산도 ‘불용액 선인식’ 개념으로 구조조정 항목에 포함됐다. 수소차 및 수소충전소 사업 예산 2,250억 원, 우체국예금 지급이자 및 반환금 예산 1,200억 원 등 7조 원 중 가장 많은 규모가 불용액 처리였는데 이 역시 내년 예산에 다시 잡힐 사업들이다.
정부가 각종 필요에 의해 깎아주는 세금도 아직 그대로다. 내년도 세제개편안에서 정부는 올해 일몰을 맞는 비과세ㆍ감면 제도 74개 중 64개(86.5%)의 일몰 시기를 더 연장하기로 했다. 농어업 기자재 부가가치세 감면 1조7,000억 원 등 5조5,000억 원 규모다. 오히려 2020년(5조 원), 2021년(5조2,000억 원)보다 더 늘었다.
윤 대통령은 2013년 국정감사에서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라는 말로 유명해졌다. 상관의 비위를 맞추기보다 원칙대로 행동한다는 강직함을 브랜드 삼아 자신을 임명한 정권과 맞서다 대통령까지 올랐다.
지출 구조조정은 어쩌면 ‘사람’과의 싸움이다. 우리 동네에, 내 월급 통장에 들어오던 예산을 끊는다는데 가만있을 사람은 없다. 국회의원, 지역 유권자, 농어민 등 정말 다양한 사람의 이해가 얽혀 있다. 처음엔 호기롭게 나서지만, 결국 정치인은 뒤로 빠지고 공무원에게 그럴싸하게 장부만 꾸미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역대 모든 정부가 실패했던 이유다.
세상에 나쁘기만 한 예산은 없다. 괴롭고 골치 아프지만, 덜 필요한 예산을 빼 더 필요한 곳에 쓰는 게 구조조정이고 대한민국이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아야 성공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의 초심이 지금 지출 구조조정에 딱 필요한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