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효과’ 본격화… 정부는 팔짱만

입력
2022.07.30 12:01
23면


‘세계 1XX개국 수출’. 한국 영화 관련 기사에서 쉬 접하는 문구다. 영화사들은 종종 수출 국가 수에 연연하며, 이를 적극 알리려 한다. 숫자가 곧 영화의 우수성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니까. 2, 3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영화가 수출되는 국가별 가격은 큰 차이가 없었다. 그저 많은 국가에 팔수록 돈을 더 버는 구조였다. 상업영화든 예술영화든 팔리는 가격이 크게 다르지 않기도 했다.

‘기생충’(2019)이 변곡점이었다.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기생충’을 사간 해외 영화사들이 대박이 났다. 빌딩 하나씩은 지을 정도로 수익을 남겨 세계 곳곳에 ‘기생충 빌딩’이 들어서게 됐다는 우스개가 생기기도 했다. 프랑스 수입업자는 감사한 마음에 서울을 찾아 봉준호 감독 등 주요 관계자들에게 식사대접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난 5월 제75회 칸영화제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프랑스 영화사에 파격적으로 높은 가격에 팔렸다. 구매 경쟁이 치열해 몸값이 올랐다. ‘기생충 효과’가 작용한 셈이다. 영화계에서는 이제 수출 국가 수가 아닌 판매 단가를 보고 수출 실적을 평가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한국 영화산업이 다른 차원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 17일 막을 내린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도 급변을 감지했다. 해외 관계자들의 높아진 관심을 확인해서다. 해외 영화인들은 주로 항공기나 숙박 제공 조건으로 국내 영화제를 찾는다. 하지만 올해 부천영화제는 자비로라도 오겠다는 해외 영화인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부천영화제로 한국을 처음 찾은 영국 영화평론가 데이먼 와이즈는 “예전엔 영국에서 한국 영화를 보는 사람은 소수였다”며 “‘기생충’ 이후 한국 영화가 ‘선을 넘었다(Cross the Line)’”고 말했다.

한국 영화계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시기를 보내고 있는 걸까. 겉보기와 달리 한국 영화계는 코로나19로 직면한 위기가 만만치 않다.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의 영화발전기금(영발기금) 고갈이다.

영진위는 영발기금을 재원으로 매년 1,000억 원 안팎의 한국 영화 지원 사업을 벌여 왔다. 영발기금은 극장 영화관람료의 3%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충당돼 왔다. 2019년엔 546억 원가량이 걷혔다. 코로나19로 극장 관객이 쪼그라들면서 영발기금 징수액은 급감했다. 2020년엔 105억 원, 지난해엔 170억 원 정도에 그쳤다. 영진위가 보유하고 있던 여윳돈 750억 원은 2020년 코로나19 지원금으로 소진됐다. 돈 나올 곳이 없으니 빚을 낼 수밖에. 영진위는 공적 자금 800억 원을 차입해 올해 예산을 꾸렸다. 사회적 거리 두기 해제로 극장 관객이 늘고 있다고 하나, 영진위는 올해 영발기금 징수액을 285억 원가량으로 예측하고 있다. 외부 지원 없이는 차입 경영을 지속해야 할 처지다.

영화인들은 지난 6월 윤석열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영진위에 대한 국고 지원을 요청했다. 대통령이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는 전언이다. 하지만 내년 예산 편성에 대해 기획재정부가 난색을 표한다는 말이 들린다. 영진위가 차입으로 연간 부담해야 할 이자만 약 10억 원이다. 저예산 영화 1편은 족히 만들 돈이다. 내년에 돈을 더 빌리면 이자는 늘게 된다. 지원 사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기생충’은 한국 영화가 퀀텀 점프할 기회를 만들었다. 정부가 나서 도약대를 마련해 줄 때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