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이 공정인가..."위선 벗기고 더 나은 담론 논의해야"

입력
2022.07.29 04:30
14면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첫 책
'공정 이후의 세계' 
한국사회 공정 담론의 위선 낱낱이 해부
"공정은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일 뿐" 
대안 담론 제시하지 못한 정치권도 비판
"보편적 적의와 돌봄이 대안"

“소모적인 공정 논의를 끝내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공정 담론의 위선을 벗기고, 가려졌던 대안적 담론들을 적극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공정이 시대정신처럼 귀한 대접을 받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다. ‘시대와 불화하는 삶’을 좌우명으로 삼은 김정희원(40)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가 책 ‘공정 이후의 세계’에서 공정 담론을 낱낱이 해체한 배경이다. 27일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김정 교수는 “알아서 각자도생하게 내버려 두고 그것이 공정이라고 말하는 사회가 과연 올바른 사회인가”라며 “우리는 다른 가치와 담론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공정이란 단어엔 죄가 없다. 공정이 노동ㆍ여성ㆍ장애ㆍ복지 등 다른 담론에 앞서는 최우선 가치가 된 지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 한국사회에서 얘기되는 공정은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란 뜻에 가깝다. ‘공정’이라고 쓰되, ‘무한경쟁’ 내지 ‘각자도생’이라고 읽어도 틀림이 없다.

가령 2020년 사회를 달군 인천국제공항(인국공) 비정규직 정규직화 문제. 정부가 보안검색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화하니 청년층은 “운으로 정규직이 되는 것은 불공정”이라고 분노했다. 무기계약직 전환이라 엄밀히 말해 정규직이 아니고, 애초 공채 선발 직군이 아니라 정규직 채용과 무관하다는 ‘팩트’에도 공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놀란 정부는 이후 비정규직 차별 이슈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공정 담론이 노동 담론을 공론장에서 밀어내는 현상, 학계에선 이를 ‘담론이 무기화됐다’고 한다. 담론의 무기화는 건강한 토론을 막는다는 점에서 ‘닫힌 담론’이란 부작용을 가져온다. 여성, 노동, 복지 문제를 두고 ‘공정이냐 아니냐’만 따지고 드는 현 상황은 심각한 사회적 병리다. "다른 국가들은 인플레이션, 경제 불황, 기후위기, 전쟁 등 복합적 위기 속에서 돌봄, 보편적 정의 등의 가치를 논의하는데, 우리 사회는 공정으로 포장된 경쟁만 얘기한다. 이런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그가 책을 쓰는 동안 공정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최근 연세대 일부 학생들이 ‘시급 440원 인상’을 요구하며 학내 집회를 벌인 청소노동자 측에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김정 교수는 “내가 손해 보는 것,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고 어떻게든 되갚아주려는 게 공정 담론이 만들어낸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무한경쟁식 공정을 필요로 하는 건 사회 기득권층이다. 아무런 규제가 없어야 마음껏 돈과 자원을 불릴 수 있다. 약자를 지원하는 복지정책, 독과점 규제는 자산 증식에 방해가 될 뿐이다. ‘구조적 차별과 불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결과는 공정한 경쟁의 결과’라는 말을 하는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자.

공정한 경쟁이 공정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능력주의'도 거짓이다. 사교육업계의 2021년 영재학교 최종 합격자 명단에 따르면, 서울과학고 정원 120명 중 66명이 대치동 같은 학원 출신이다. 경기과학고(정원 120명)는 61명, 한국과학영재학교(정원 120명)는 64명이 이 학원 출신이다. 대치동 땅의 기운이 좋아 영재가 많이 태어나는 걸까, 부와 교육의 대물림 효과일까.

능력주의보다 정의로운 분배와 복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청년층이 '공정'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한국 사회가 불공정하다는 인식이 워낙 크다. 이걸 바로잡으려면 정의로운 자원 분배가 필요한데, 다들 불공정한 경쟁 때문에 내게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즉각적 반작용으로 ‘경쟁의 공정’만 요구한다.”

‘그런 공정은 잘못됐다’고 핏대를 세워야 할 진보 진영은 기득권의 이중대를 자처하고 있다. 김정 교수는 “지난 대선 때 윤석열 후보와 이재명 후보가 똑같이 ‘내가 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외쳤다. 진보 진영은 새로운 담론과 가치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누구나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사회ㆍ경제적 조건을 보장하는 ‘보편적 정의’를 대안 담론으로 제안했다.

김정 교수는 미국에서 나이 어린 동양인 여성이다. 미국 주류인 백인ㆍ남성ㆍ중장년에 비해 소수자다. 그는 “미국에서도 구조적 차별의 공고함을 피부로 느꼈다”고 했다. 구조적 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급진적 자기 돌봄’이란 투쟁과 연대의 방법을 소개한다. 자신의 고통이 사회 부조리와 연결돼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구조 변화를 요구하면서 서로 끌어안고 돌보며 버텨내자는 얘기다.

즉각적 분노를 부르는 공정 담론에 대항하기엔 연대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맞다. 하지만 구의역 김군 사고가 일어났을 때 평범한 사람들이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구의역 9-4 승강장으로 달려갔던 그 감각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 버려지는 사회라면 언젠가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느낌도 잊지 말자. 혼자 힘으로는 구조적 차별에 맞설 수 없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고, 어떤 도화선만 있다면 연대의 움직임이 크게 솟아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지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