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이 근면했던 프랭클린이야 그랬겠지만, 배기는 뒷목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는 '베개 유목민'이라면 이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베개가 최악의 피곤 유발자"라는 말이 적절하다.
베개 유목민은 자신에게 꼭 맞는 '인생 베개'를 찾아 틈만 나면 인터넷 쇼핑몰이나 침구 매장을 헤매는 이들이다. 베개마다 평점을 매기며 어디엔가 존재할 베개의 이상향을 찾아 베개를 바꾸고 또 바꾼다. 인터넷에 이 말이 보통명사처럼 쓰이는 것은 그만큼 어깨나 목의 불편감 때문에 잠을 설치는 이들이 많다는 증거다.
옷이나 시계, 장신구 정도를 빼면 하루 중 사람 몸에 가장 오래 붙어 있는 물건. 잘못 고르면 잠을 설치게 하고, 급기야 인생에 불행을 선사하는 요물. 그런 베개의 중요성을 깨닫고 인생 베개를 찾아나선 유목민의 대열에, 거북목 탓에 목이 뻐근해 밤잠을 설치는 기자도 동참했다.
사람들이 최근 베개에 집착하는 이유는 숙면과 베개의 연관 관계가 크다는 점이 잇따라 입증되고 있어서다. 의학계에 따르면 쾌적한 수면을 결정하는 요소는 크게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 두 가지로 나뉘는데, 심박이나 뇌파 등 내적 요인은 사람이 쉽게 바꿀 수 없다. 반면 외적 요인인 △침구류(매트리스와 베개) △침실의 온도와 빛 △소음 등은 노력에 따라 충분히 바꿀 수 있다. 편안한 수면을 꿈꾸는 이들에게 베개만큼 손쉽게 수면의 질을 향상시킬 방법은 없는 셈이다.
잠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수면 산업을 가리키는 슬립 이코노미(Sleep economy) 시장도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독일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세계 슬립 이코노미 시장 규모는 2019년 기준 4,320억 달러(약 565조 원)에서 2024년 5,850억 달러(약 765조 원)로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베개 시장은 같은 기간 156억 달러(약 20조4,000억 원)에서 181억 달러(약 23조7,000억 원) 규모로 커진다.
잠을 위해 돈을 기꺼이 쓰겠다는 소비자들이 늘어나자 베개를 만드는 회사도, 베개의 종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이런 베개의 홍수 시대, 나의 인생 베개는 어디 있을까? 베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베개학 개론' 공부를 시작했다.
우선 편안한 베개의 가장 큰 조건은 누워 있을 때의 자세를 서 있을 때와 똑같이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즉 베개 형태가 자신의 머리와 목, 어깨의 체형과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경추 높이다. 경추란 머리를 지지해주는 7개의 목뼈를 말하는데, 누웠을 때 바닥에서 이 경추까지의 거리를 경추 높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타고난 체형이 다르고, 자세나 생활 습관에 따라 경추 높이가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경추 높이가 2㎝가 채 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은 8㎝가 넘는다고 한다. 18일 서울 강남구의 한 베개 체험 매장을 방문해 경추 높이를 측정했더니, 4.3㎝라는 값이 나왔다.
그렇다. 기자는 거북목이었다. 직원의 말을 듣자 잠시 숙연해졌다. 경추 높이가 길다는 것은 그만큼 머리와 목이 몸보다 앞으로 나와 있다는 뜻. 이브자리 수면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인 평균 경추 높이가 2.04㎝라고 하니, 기자의 경추 높이는 평균보다 2배 이상 긴 셈이다. 그동안 잠을 잘 때 베개가 낮다고 느껴져 베개를 반으로 접어 베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거다.
좋은 베개를 고를 때 고려해야 하는 또 다른 조건은 수면 자세다. 천장을 바라보고 똑바로 자는 사람은 머리와 어깨 사이의 빈 공간을 채우도록 베개의 목 부분만 높으면 된다. 베개가 딱 경추 높이만큼을 채워주면 되는 것이다.
반면 옆으로 누워서 잔다면 목부터 바닥까지의 거리가 똑바로 잘 때보다 더 길어지기 때문에 베개의 높이가 더 높아야 한다. 기자는 왼쪽으로 누워서 자는 습관이 있는데, 평소 베개가 낮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또 있었던 셈이다. 모로 누워 자는 사람은 똑바로 자는 경우보다 2~4㎝ 정도 더 높은 베개를 사용하는 게 좋다고 한다.
지금보다 높은 베개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았다. 다음은 소재를 결정해야 했다. 베개 소재는 생각보다 다양했다. 전통적인 솜 베개부터 거위털(구스다운)이나 오리털(덕다운) 베개, 메모리폼과 라텍스, 짧은 빨대 모양의 파이프칩을 베갯속으로 사용하는 종류도 있었다. 최근에는 메모리폼과 파이프칩을 모두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베개도 인기라고 한다.
우선 솜이나 거위털, 오리털 베개는 후보군에서 제외했다. 너무 푹 꺼져 높이가 지나치게 낮아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해외 유명 브랜드 A사의 10만 원대 초반의 거위털 베개는 아쉽게도 선택지에서 빠지고 말았다. 매장에서 직접 체험해보니 두 개를 베고 자야 할 정도로 낮았다. 땀이 많이 나는 사람은 통기성이 좋은 거위털 베개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는 솜털보다 깃털의 비율이 높으면 덜 가라앉는다고 한다. 파이프칩 베개는 경추를 잘 지지해줬지만 특유의 촉감이 너무 딱딱해 만족스럽지 않았다. 머리를 잘 받쳐주면서도 푹신한 베개가 필요했다. 국내 B브랜드의 9만 원대 베개도 제외됐다.
결국 메모리폼이나 라텍스로 선택지가 좁혀졌다. 그렇게 폭을 좁힌 뒤 국내외 7개 브랜드 매장에 방문해 20여 개의 베개를 직접 사용해봤다. 그렇게 발견한 기자의 인생 베개는 C사의 메모리폼 베개였다. 이 베개는 양쪽이 높게 설계돼, 옆으로 잘 때는 높은 쪽, 반듯하게 잘 때는 낮은 쪽으로 벨 수 있는 기능성 베개였다. 높이도 경추에 맞았는지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메모리폼 특유의 푹신함이 마음에 들었다. D사의 라텍스 베개의 경우 열에 의한 경화 현상이 우려돼 후보군에서 빠졌다.
중언부언 여러 이유를 붙여 설명했지만, C사 베개를 선택한 건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누웠을 때 가장 편했기 때문이다. 소재도, 높이도, 모양과는 별개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실제로 일주일간 새 베개를 사용한 결과 잠을 자고 난 뒤 어깨나 목의 뻐근함이 확연히 줄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한 번 익숙해진 베개에 대한 애착이 커 베개를 바꾸면 잠을 제대로 못 잔다고 하지만, 기자는 적응 기간도 없이 베개를 바꾼 첫날부터 '꿀잠'을 잤다. 베개 하나만 바꿨을 뿐인데 수면의 질이 한층 올라갔다.
전문가들은 베개를 고를 때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인터넷 후기에 의지할 게 아니라, 본인이 현장에서 직접 누워본 뒤 결정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조언한다.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베개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최악의 베개'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만들어 주는 베개라면 어떤 소재, 어떤 모양도 상관없다. 사람마다 자기 나름의 인생 베개가 따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박성빈 이브자리 수면환경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제 경우에는 군대 시절 사용했던 그 딱딱한 직사각형 베개가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며 "그 이후에도 직접 개인 맞춤으로 만든 단단한 베개를 사용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좋은 베개에 정답은 없다"는 게 박 연구원의 조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