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재개된 재계의 최대 잔치 '대한상의 제주포럼(13~15일)'에서 추경호 부총리를 만났다. 그는 새 정부 경제정책방향을 설명하는 강연을 했다. 경제관료 출신답게 현 경제 상황을 잘 요약해 알기 쉽게 설명하는 기민함이 돋보였다.
하지만 주 52시간 근무제(52시간제)에 대한 설명은 거슬렸다. 추 부총리는 "일주일 내 52시간을 (일)하라고 하니 현장에서 맞지 않았다. 유연하게 해보자는 이야기다. 근로자보고 92시간 동안 일하라는 게 말이 안 된다. (정치권·노동계에서) 덮어씌우는 것"이라고 했다.
한 달 전 발표한 노동시장 개혁 방안의 주요 내용이었던, 52시간제 유연화에 대한 부연이었다. 당시 기존 주 단위로 제한했던 연장근로(12시간)를 월 단위로 관리한다고 하자 “주당 92시간 근무하라는 거냐”는 노동계의 반발이 나왔다. 추 부총리는 이 주장이 몹시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노동계 의견은 극단적인 산술에 기반한 예시였다. 즉, 한 달간 사용할 수 있는 연장근로시간인 52시간을 한 주에 몰면 92시간 일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즉각 고용노동부가 "근로일 사이에 11시간 이상의 휴식을 주는 등 근로자 건강 보호 조치가 필수여서 실현 불가능한 계산"이라고 반박해 일단락 됐지만, 기업 친화 정책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고용자 입장에선 현장의 다양한 수요에, 기존 인력을 맞출 수 있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하는 현 경제위기에선 더욱 효율적으로 인력관리를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예컨대 납기일이 급한 주문이 들어온다면 손쉽게 야근 등으로 해결할 수 있어 매우 유용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하는 직장인을 부모로 둔 자녀 입장에선 이 정책은 어떤가. 부모 돌봄을 받으며 일주일을 규칙적으로 생활해야 하는 아이들에겐 아마 날벼락 같은 소리일 것이다. 지금도 부모 퇴근시간만 오매불망 기다리는데, 이젠 일주일 가까이 부모 얼굴조차 못 보고 홀로 지낼 수도 있다는 뜻이어서다.
평범한 맞벌이 직장인들은 퇴근과 자녀들의 하교 시간이 일치하지 않아 곤혹스럽다. 가족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이뤄지는 밥상머리 교육은 고사하고, 매일 자녀 하교 이후를 걱정한다. 방과 후 과정이나 초등 돌봄교실조차 운영시간이 오후 8시를 넘지 않아, 계획되지 않은 야근을 할 때면 피 말리는 기분마저 든다.
이럴 땐 육아 스케줄에 따라 근무 시간과 장소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단비'가 절실하다. LG디스플레이 등 일부 기업에서 실시하고 있는 변형된 유연근무제가 대표적이다. 자녀 하교 시간에 맞춰 퇴근해 잠깐 돌봄 시간을 가진 뒤, 다시 집 등 원하는 장소에서 나머지 업무를 처리하도록 하는 제도다.
52시간제를 손보면서 이런 반대급부를 제시했다면 어땠을까. 근무시간을 융통성 있게 조절하는 권한을 근로자에게 주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양육을 중시하는 직장인이라면 보수가 줄더라도 하교하는 자녀를 맞이하기 위해 근무시간 단축을 선택할 것이다. 여기에 재택근무 등 다양한 근무방식을 추가한다면 업무량을 채울 수도 있다. 또 더욱 많은 보수를 중시한다면 추가근무를 자유롭게 하면 된다.
새 정부 출범 두 달이 넘었지만 가정과 일이 균형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직장인이자 초등학생 자녀를 둔 아빠로서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