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림된 고통, 증발된 기억

입력
2022.07.26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남편이 소송을 도맡아왔는데 남편마저 세상을 뜨고 나니 아무것도 모르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어요. 들은 얘기도 없고, 남아있는 것도 없어 혼란스럽기만 해요."

2019년 6월 27일 강제징용 피해자 14명과 그 가족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의 항소심 판결 후 박영숙씨는 나지막이 토로했다.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승소했지만, 기쁨보단 혼란이 컸다. 박씨는 사건 당사자도, 당사자의 직계 자손도 아니다. 사건 당사자인 홍순의 할아버지의 며느리다.

이 사건 재판에는 생존 피해자가 한 명도 없다. 홍순의 할아버지가 마지막 생존자였는데,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다 2015년에 눈을 감았다. 당시 원고단 단장이었던 박상복씨 또한 "문제 해결이 늦어지면서 1세대 어르신들이 다 돌아가시고 2∙3세대까지 고통받고 있다"고 털어놨다.

최근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을 위한 한일 양국 간 움직임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모두가 '배상'에 주목하고 있지만, 한 가지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이 있다. 사라져가는 기록 수집의 필요성이다.

1939년 시작된 일제의 강제동원령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가까스로 목숨만 보전해 귀환한 조선인은 대략 110만여 명에 달한다. 해방되고도 돌아오지 못한 이들까지 포함하면 300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현재 이들 중 대부분은 세상을 떠났고, 생존자들은 대개 90~100세로 매우 연로하다.

살아 돌아온 이들의 기억에는 더 이상 살이 찌지 않는다. 도리어 모진 세월의 풍파에 닳아져 갈수록 야윌 뿐이다. 수도 없이 많이 피해를 증언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기록되지 못했다. 활자화되지 못한 기억은 뭉개지고 희미해지다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건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정도다. 이들이 입은 피해를 입증할 자료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정부의 무심함 속에 빛을 바랜 채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실제 2004년 꾸려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세 차례에 걸쳐 총 22만여 건의 강제징용 피해를 접수했지만, 이 중 증거자료가 있는 경우는 약 20%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피해 당사자나 가족의 기억으로만 피해 사실을 주장할 뿐 이를 뒷받침할 사진이나 문서는 갖추지 못했다. 피해자 대부분이 해방과 동시에 가까스로 작업장을 탈출하느라 증거자료를 거의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져온 몇 안 되는 사진이나 일기 등의 증빙자료는 정부가 1974년 청구권보상법률에 따라 보상금 지급을 위해 수집했다가 잃어버렸다. 현재 남아있는 건 신고인 명부와 보상금 지급대장뿐이다.

일본정부와 기업이 수십 년간 공개하지 않고 있는 수많은 공탁금 명부와 후생연금명부 등을 확인하면 피해자들이 보다 수월하게 자신의 피해를 입증할 수 있지만, 이를 확보하기 위한 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언젠가부터 희미해졌다.

기록은 진실을 밝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자 동시에 가해국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일본의 역사관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록은 반드시 필요하다. 피해자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너무 연로한 지금, 이들의 피해를 입증할 기록들을 모으는 건 정부의 몫이다. 정부는 피해 배상 절차와 함께 근거 자료 수집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김진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