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미국을 뒤흔든 결혼증명서

입력
2022.07.25 04:30
24면
클레라 로렉스(Clela Rorex, 1943.7.23~2022.6.19)

1975년 3월 미국 콜로라도 주 볼더 카운티 서기(county clerk) 클레라 로렉스(Clela Rorex, 1943.7.23~2022.6.19) 앞에 두 남자(David McCord와 David Zamora )가 앉았다. 그들은 결혼증명서를 원했다. 헌법이 정한 서기의 권한과 역할이 카운티 공문서 기록관리를 포함한 제 증명서 발급이었다.

취임한 지 석 달도 안 된 만 31세의 신임 서기 로렉스는 직무 매뉴얼에 따라 인적사항을 기록하며 사연을 청취했다. 말인즉슨, 둘은 게이인데 주택 입주권(homestead rights)을 신청하려니 법적 부부가 돼야 해서 연고지인 콜로라도스프링스에 갔더니 자기네는 발급해줄 수 없으니 볼더에 가보라고 해서 왔다는 거였다. 대학도시 볼더는 ‘히피의 고향’이라 할 만큼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도시로,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자칭타칭 ‘볼더 공화국’이라 불리기도 한다. 74년 시의회가 성소수자 취업과 주거 차별을 없애기 위한 조례를 제정하려다 의원 한 명이 주민소환 투표로 쫓겨나기도 했다.

로렉스는 “어떤 방법이 있을지 찾아보겠다”며 일단 그들을 돌려보낸 뒤 카운티 검찰청(법무 겸임)에 자문을 요청했다. 며칠 뒤 당시 검사보(ADA) 윌리엄 와이즈(William Wise, 2016년 작고)는 “주법상 결혼 당사자가 반드시 남녀여야 한다는 규정은 없으니 서기 권한으로 증명서를 발급할 수 있다. 당신 판단에 달린 문제다”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여성 권리를 위해 싸워온 페미니스트로서, 로렉스에게 동성결혼도 평등권의 문제였다. 그는 3월 26일 신청서의 ‘male’과 ‘female’ 항목을 ‘person’으로 수정한 결혼증명서를 발급했다. 그는 “나로선 극히 논리적인 판단에 따른 거였다”고, “결혼은 법이 보장한 권리인 만큼 동성이라도 당사자가 원하면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증명서를 발급해주지 않는 건 불공평하다고 판단했다. 여성으로서 성평등을 요구해온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네 차례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스톤월 항쟁(69년 6월) 5년여 뒤였다. 70년 뉴욕과 LA에서 첫 LGBT 프라이드 행진이 시작됐고, 이듬해 칼 위트먼(Carl Wittman)이 ‘게이 선언문’을 발표했다.
백래시도 격렬해졌다. 성소수자 인권운동 원년으로 치는 69년 그 해, 맹렬한 반동성애자인 가수 애니타 브라이언트(Anita Bryant, 1940~)가 ‘아이들을 구하자(Save Our Children, 나중에 'Protect America’s Children'으로 변경)’는 구호로 69년부터 ‘품위를 위한 집회(Rally for Decency)’라는 전국적 캠페인을 시작했고, 캘리포니아에서는 공립학교 동성애자 교사 자격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게이 인권운동가 하비 밀크(Harvey Milk)가 78년 암살됐다. 2003년 연방대법원이 ‘소도미법’을 위헌 판결(Lawrence v. Texas)할 때까지 동성간 성행위 자체가 불법이었다. 그 격랑의 와중에, 초짜 싱글맘 서기가 동성 커플에게 결혼증명서를 발급한 거였다.

동성애자 결혼증명서 발급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해 1월 애리조나 피닉스의 한 게이커플이 증명서를 받았지만, 신부(여성)란에 남성이 인적사항을 기재한 사실이 드러나 법원에 의해 무효화된 예가 있었고, 71년 결혼증명서 발급을 거부당한 미네소타의 게이 커플이 소송을 제기했다가 연방대법원에서 패소한 예도 있었다. 하지만 로렉스의 증명서는 공식적 법률자문까지 거쳐, 형식과 절차 면에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적법 공문서였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당연히 성소수자와 인권운동 진영에겐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에 맞먹는 기적이 일어난 셈이었고, 무심한 다수 시민들에겐 ‘강 건너 불구경’보다 흥미로운 이슈가 생긴 셈이었지만, 반게이 진영에겐 불시에 따귀를 맞은 것 같은 일이었다.
당장 게이 차별금지 조례를 발의한 시의원을 쫓아낸 볼더 주민들에게 로렉스는 악마였다. 그들의 도시를 ‘소돔’으로 타락시키고, 전국의 게이들을 불러모아 집값을 폭락시키려는 원흉이었다.

비난·항의 전화와 편지가 빗발쳤다. 신도 전원이 각자 항의 편지를 보낸 교회도 있었다. ‘서기가 레즈비언’이라는 풍문도 돌았다. 당시 만 8세였던 로렉스의 장남(Scott Poston)은 “어머니가 암살을 당할까봐 두려웠다”고 말했다. 십자포화의 과녁이었던 로렉스는 훗날 “모든 지옥문이 한꺼번에 열렸다"고 표현했다.

설상가상, 며칠 뒤 암말 ‘돌리(Dolly) 사건'이 터졌다. 로스 하워드(Ros Howard)라는 한 중년 카우보이가 말을 탄 채 기자들을 양떼처럼 몰고 서기실에 들이닥친 거였다. 그 남자는 마치 성명서를 낭독하듯 미리 준비한 멘트를 던졌다.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면, 나처럼 늙고 지친 카우보이가 내 가장 친한 친구인 애마 ‘돌리’와 결혼하는 건 왜 안 되는가.”
기자들이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로렉스는 짐짓 침착하게 매뉴얼대로 하워드와 대화하며 신청서 항목들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로렉스는 돌리의 나이를 물었고, 하워드는 8살이라고 답했다. 로렉스는 가만히 펜을 내려놓고 이렇게 응수했다. “이런, 무척 유감스럽지만 증명서를 발급해드릴 수 없겠어요. 신부가 너무 어려서 부모님 동의가 필요해요.”
현장 기자들은 저 해프닝을 사진과 함께 보도했고, NBC 인기 토크쇼인 자니 카슨의 ‘투나잇쇼’에도 사연이 소개됐다. 그 와중에도 로렉스는 4월까지 약 한 달간 레즈비언 2쌍을 포함, 모두 6쌍의 동성 커플에게 결혼증명서를 발급했다. 그 중 3쌍은 캘리포니아 등서 먼 길을 온 이들이었다.

로렉스의 '가만한 활약'은 약 한 달 뒤 주 검찰총장(법무장관)이던 J. D 맥팔레인(MacFarlane)이 ‘주법상 동성 결혼증명서 발급은 허용될 수 없다’는 의견서를 카운티 검찰을 통해 로렉스에게 전달하면서 멈췄다. 하지만 그의 소신은 여전했다. 2016년 인터뷰에서 그는 “단 한 번도 내 결정을 후회한 적 없다. 하지만 당시 나는 소환투표로 임기를 채우지 못할 게 거의 확실했”다고 말했고, 다른 인터뷰에서 “그들(동성애자)에게 허용되지 않을 권리에 대한 헛된 기대를 품게 한 건 아닌지 염려가 됐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우려와 달리 주정부는 이미 발급된 게이 결혼증명서를 무효화하기 위한 법적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여성으로서 성평등을 요구해온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당신 차례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Clela Rorex, History Colorado 인터뷰

로렉스에겐 우군이 없었다. 그의 정당인 민주당도, 의회 소속 의원들도 불똥이 튈까봐 거리두기에 급급했고, 페미니스트 동료들도 수수방관하거나 등을 돌렸다. 베티 프리댄 등이 제기한 ‘라벤더 위협(lavender menace), 즉 동성애자들이 여성운동에 끼칠 수 있는 해악을 경계하던 때였다. 동성애자 인권운동 진영 역시 힘을 보태지 못했다. 연애조차 목숨 걸고 하던 시절이었고, 조직 활동가들에겐 싸워야 할 전장이 너무 많았다. 동성혼 이슈가 너무 급진적이라는 진영 내부 이견도 있었다. 로렉스는 친구도 동지도 잃었고, 평소에도 ‘페미’ 누이를 껄끄러워하던 남동생도 절연을 선언했다. 그가 생물학적 '혈육'은 아니었다.

클레라 로렉스는 1943년 콜로라도 덴버에서 태어나 교사 겸 무용강사 양어머니와 광부 양아버지에게 입양돼 스팀보트 스프링스(Steamboat Springs)에서 성장했다. 그는 생부모를 알지 못했다. 광산 사고로 다리 한 쪽을 잃은 장애인 아버지는 콜로라도 라우트(Routt) 카운티 서기로 약 30년간 일했다. 로렉스의 장남 스콧은 “어머니는 입양아로서 겪은 유년의 여러 경험과 장애인 아버지를 지켜보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감수성을 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당시의 그는 고교 졸업 직후 해군 장교와 결혼해 쿠바 관타나모에서 약 3년간 살다가 이혼 후 어린 스콧을 데리고 볼더로 귀향, 아이를 키우며 73년 콜로라도 볼더대를 졸업한 싱글맘이기도 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였다. 72년 창간한 페미니즘 잡지 ‘미즈(Ms)’에서 착안한 듯, 그의 자동차 번호판은 ‘MS1’이었고, 범퍼에는 'Yes! Equal Rights’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다.

또 그는 열성 민주당원이었다. 볼더 카운티 신임 서기 선거 후보를 정하던 74년 당직자 회의에 로렉스도 참여했다. 그는 공화당 여성 후보에 맞서기 위해 민주당 후보는 무조건 남자여야 한다는 당론에 반발, 출마를 선언했다. 아버지가 하던 일을 어깨너머로 보아온 터였고, 71년의 수정헌법 26조로 유권자 연령이 만 21세에서 18세로 낮춰진 것도 그의 도전을 부추겼다. 그는 여성단체 회원 등과 함께 대학가를 집중 공략, 당 지원을 받은 남성 후보를 제치고 경선에서 승리했고, 그해 11월 카운티 서기에 당선돼 이듬해 1월 취임했다. 그리곤 저 세기의 파문을 일으켰다.

주민소환의 운명을 감지한 로렉스는 임기를 절반 가량 남긴 77년 서기직에서 사퇴하고 당시의 연인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하지만 그의 삶은, 스스로 밝힌 것처럼,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75년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괴짜’ ‘외골수’ 이미지 때문에 취업에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와의 인연도 짧아 그는 이내 다시 귀향, 콜로라도 덴버대에서 81년 공공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3차례 결혼-이혼하며 2남 1녀를 두었다.

그는 주간(interstate)세무위원회를 거쳐 지역 ‘원주민인권펀드’ 법률 관리자로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만 18년간 일했고, 전미여성협회(NOW) 볼더 지부장도 역임했다. 그리고 지역 성소수자 인권단체인 'Out Boulder County' 회원으로서 말년까지 성소수자 이슈에 발벗고 나섰다.

그의 결혼증명서를 발급받은 커플들의 삶도, 게이란 사실이 알려져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는 등 순탄치 않았다. 호주 출신 앤서니 설리번(Anthony Sullivan, 당시 33)과 LA 출신 리처드 애덤스(Richard Adams, 당시 28)도 그의 6쌍 중 한 커플이었다. 71년부터 연인이던 그들은 설리번의 ‘결혼 영주권’을 얻고자 75년 4월 결혼증명서를 발급 받았다. 설리번은 그해 10월 이민국(INS, 현 USCIS)에 영주권을 신청했다. 하지만 이민국은 승인 거부 공문과 함께 사유서를 보내왔다. “당신들은 두 패것(faggots, 남성 동성애자의 멸칭)이 진정한 결혼관계로 맺어질 수 있다는 걸 입증하지 못했다”는 문구가 포함돼 있었다.

그들은 증명서 효력을 인정받기 위해 이민국과 연방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잇달아 패소했다. 제9 순회법원은 “콜로라도 주정부의 적법한 결혼증명서가 있긴 하지만, 이민을 관리하는 의회로서는 배우자라는 용어를 결혼의 통상적인 정의인 남성과 여성 이상으로 확장할 의도가 없다”고 평결했고 대법원은 상고 심리를 기각했다. 호주 정부도 게이 배우자 애덤스의 영주권 신청을 거부하면서 설리번은 혼자 강제 출국 당할 위기에 몰렸다. 둘은 이민법상 ‘극심한 고통(extreme hardship)’이 예상될 경우 강제출국 조치를 면제받을 수 있다는 조항을 들어 다시 소송을 제기했지만 또 패배했다. 85년 항소법원은 “개인적 고통과 감정적 상처가 없는 강제출국은 거의 없다”고 판결문에 썼다. 부부는 ‘자발적 추방’을 선택해 함께 런던으로 떠났고, 아일랜드 등지를 떠돌다 몇 년 뒤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불법’ 입국, LA에 정착해 ‘클로짓 이민자’로 살아야 했다.

2003년 매사추세츠 주를 시작으로 각 주가 잇달아 동성혼을 법제화했다. 콜로라도 주도 24번째로 2014년 7월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이듬해 6월 연방대법원이 마침내 동성혼을 헌법의 권리로 인정했다(Obergefell v. Hodges). 로렉스가 결혼증명서를 발급한 지 만 40년 만이었다. 2014년 인터뷰에서 로렉스는 "만일 당시 내가 다른 결정을 내렸더라면 지금 거울을 바라보는 것조차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2년 암으로 애덤스를 잃은 설리번도 2015년 이민국의 공식 사과문과 함께 배우자 영주권을 받았다. 그는 “클레라 덕에, 우리가 싸워온 덕에 오늘의 우리가 결혼 평등권을 누릴 수 있게 됐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설리번도 2020년 별세했다. 그들의 고통과 분노는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