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보내기 위해 아이들을 깨우다 보면 자주 듣는 투정이 있다. "오늘 학교 가기 싫어요." 이런 반응은 아이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을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이런 투정에 대한 부모의 반응은 대부분 단호한 거절이다. 이렇게 매번 의견이 대립된다면 즐겁게 시작해도 모자랄 아침 분위기는 늘 무거울 수밖에 없다.
필자 역시 초등학교 시절엔 이유 없이 등교하기 싫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허락을 받을 자신은 없었다. 고민 끝에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일단 학교를 간다고 집을 나선 뒤 단독주택이었던 집 옥상 구석에 슬그머니 숨는다. 부모님이 출근하시면 집으로 내려와 학교에 전화를 건다. 몸이 아파서 결석을 해야겠다고 거짓말을 하는 계획이었다.
완벽했던 이 땡땡이 계획은 허무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옥상으로 올라가던 중 부주의하게 발소리를 내는 바람에 인기척을 느낀 아버지께서 몰래 숨은 발칙한 아들을 발견하신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부모님은 따로 혼을 내지 않았다. 오죽 학교 가기 싫었으면 그렇게 했겠냐고, 부모님께서 내 마음을 이해하셨기 때문이란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도 아침에 '학교 가기 싫다'는 소리가 자주 나온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내가 어릴 때보다 조금 더 많다. "그러면 오늘 학교 하루 쉴래?"라든지 "오늘 한 시간 정도만 천천히 갈래? 아빠가 선생님께 말씀드려 놓을게" 정도이다. 다만 아이에게 이런 자유는 한 달에 딱 한 번만 쓸 수 있게 정해져 있다. 사전에 약속된 일종의 월차 개념이다. 이렇게 선택지를 주면 아이는 이번에 이 기회를 사용할지에 대해 제법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대답이 나온다. "오늘은 일단 갈게요."
만약 아이가 정말 쉬고 싶다고 결정한다면 뜻대로 해주되 계산은 확실히 한다. 물론 그 순간부터 점심을 비롯해 부모가 갑작스레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늘어나긴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이런 일은 매달 일어나지 않는다. 권리와 책임을 함께 넘겨주면 아이가 어리더라도 그만큼 생각의 크기도 함께 자라기 때문이다. 때로는 "오늘은 그냥 학교 가고 다음번에 힘들면 하루 쉴래요"라고 대견스럽게 답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정말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학교를 쉬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의 힘듦을 표현했을 때 단호하고 매정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공감해주는 부모의 한마디일지도 모른다. 기성세대가 돼버린 부모들 입장에서 아이들이 부리는 투정은 자신들의 어린 시절에 비해 배부른 소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이에게도 그들만의 세계 안에서 겪는 나름대로의 애환과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어르고 달래서 억지로 학교를 보내봐야 그때뿐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땡땡이를 치겠다고 마음먹으면 부모가 알아채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솝우화 '바람과 해님의 내기'처럼 단호한 대처보다는 따뜻한 접근이 훨씬 도움이 될 수 있다. 아침이 되면 어른들도 출근하기 싫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아이라고 늘 학교에 즐거운 마음으로 가고 싶을 리 없을 것이다. 이런 딱딱한 생각 하나만 살짝 바꾸기만 해도 전쟁 같은 아침시간이 조금이나마 평화로워지고 가족 간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