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불볕더위로 유럽이 펄펄 끓으면서 올해 작물 수확량이 예년보다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식량 위기가 커진 상황에서, 세계인의 식탁엔 또 하나의 비상등이 켜지게 된 셈이다. 무더위가 곡물 가격을 밀어 올리는 ‘히트플레이션(열+인플레이션)’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1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와 영국 가디언 등을 종합하면, 남서부 유럽을 덮친 최악의 폭염으로 유럽연합(EU) 최대 밀 수출국인 프랑스에서는 케이크와 쿠키 재료로 사용되는 연질 밀(soft wheat) 수확량이 작년보다 7.2%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섭씨 40도를 웃도는 기록적 폭염과 가뭄으로 곡물이 마를 것을 우려한 농민들이 일찍 수확에 나서면서 예년만 못한 결과를 받아 들게 됐다고 프랑스 농림식품부는 설명했다.
전 세계 밀의 17.6%를 생산하는 EU 역시 수확량 감소를 기정사실로 본다. 이들은 폭염을 고려, 올해 연질 밀 추정 수확량을 기존보다 500만 톤 줄였다.
이탈리아에서는 70년 새 최악의 폭염으로 최대 곡창지대인 북부 지역을 따라 흐르는 ‘젖줄’ 포강이 바싹 말라가고 있다. 밀, 쌀 등 국가 전체 곡물의 40%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탓에, 이탈리아 농민협회는 올해 수확량이 지난해보다 30%가량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가뭄으로 입은 농산물 피해 규모는 최대 30억 유로(약 4조600억 원)에 달할 것이라는 게 이들의 분석이다.
올리브, 토마토 등 이탈리아 대표 작물 역시 가뭄으로 인한 작황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영국 시장분석기관 민텍의 카일 홀랜드 애널리스트는 “올리브 나무 일부는 아직도 열매를 맺지 않았는데, 이는 토양 수분이 심하게 부족할 때만 일어나는 일”이라며 “올해 이탈리아 올리브유 생산량이 지난해보다 20~30% 줄어들 것”이라고 진단했다. 현지 정부는 최근 북부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농업분석업체 그로 인텔리전스는 현재와 비슷한 수준의 폭염이 덮쳤던 2007년 EU의 옥수수 생산량이 전년 대비 11% 줄어든 점을 언급하며 “올해 (옥수수 생산) 상위 3개국인 프랑스와 스페인, 루마니아 재배 조건도 열악하다”고 진단했다.
유럽과 가까운 북아프리카 상황도 다르지 않다. 튀니지에서는 47도를 웃도는 날씨가 이어지면서 생산량 감소를 무릅쓰고 때 이른 수확에 나서는 농민들이 늘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북부 도시 크립에서 밀 농사를 짓는 압데라우프 알파위는 “보통 7월쯤 수확에 나서지만, 올해는 6월 18일부터 시작했다”며 “양과 질이 떨어지더라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수확하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곡물 가격은 앞으로 더 오를 전망이다. 우크라이나의 올해 밀 생산이 지난해보다 35% 줄어들 것으로 보이는데, 지난해 생산된 곡물 2,500만 톤도 러시아의 흑해 봉쇄로 오도 가도 못 하고 있다.
이 영향으로 시카고선물거래소에서 거래되는 밀 가격은 전쟁 이후 3개월간 38% 넘게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폭염으로 유럽 곡물 생산량이 줄어들 경우, 곡물 가격의 추가 상승은 불가피하다.
미국 시사주간 뉴스위크는 환경전문매체 그리스트를 인용, 이 같은 현상을 ‘히트플레이션’이라고 불렀다. 폭염이 식품 가격을 끌어올리면서 글로벌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을 부채질한다는 얘기다. 그리스트는 “현재 물가 급등은 감염병으로 악화한 공급망과 전쟁의 영향이지만, 기후변화도 또 다른 동인이 되고 있다”며 “무더위와 가뭄,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불러오는 경제적 피해는 앞으로 더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