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안경이 부상인 '익은 작가상'을 만들자

입력
2022.07.18 22:00
27면

좀처럼 아무것도 써지지 않았다. 이게 '번아웃'인 모양이었다. 요리조리 각종 앱이나 프로그램을 잘 다루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책을 썼는지 어디에 기고했는지 워드프레스 등을 이용해서 인터넷에 누구나 볼 수 있는 웹 포트폴리오 등을 올리곤 하는데, 늘 시류에 뒤떨어지는 나는 지금까지 어디에 기고했는지도 거의 다 잊고 살았다. 그런데 떠올려 보니 감사하게도 그간 한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의 절반 이상이 불러 주어 다양한 독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해 왔지만 내가 낸 책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죄다 폐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지뢰를 밟은 것처럼 어느 작가님께서 내가 지금까지 낸 책의 명단을 주셨는데, 인터뷰집, 대담집, 앤솔러지 등을 포함하면 36권, 혼자서 꾸역꾸역 낸 책은 16권이었다. 아무리 데뷔를 17살에 해서 20년 넘게 글을 쓰며 살아왔다지만 참 이 짓을 오래도 했고 많이도 했다 싶어 맥이 탁 풀렸다. 이리 오래도 했는데 베스트셀러 하나 없는 삶이라는 게 좀 우스웠다. 이런 형편없는 성적에도 불구하고 계속 불러 주시는 출판사 에디터 분들에게 그저 신기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번아웃이란 게 와도 한참 늦게 도착한 셈이었다. 그러나 소위 '정통 문단'에 있는 분들에게 나는 '진짜 작가'가 아니다. '등단'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작가 면허증'인 셈이다. 신춘문예나 문예지에서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으며 작가 인생을 시작하지 못해서, 아직도 이런 질문을 받는다. "왜 등단 안 하세요?"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투고했고 서사창작과 대학원에도 진학해서 어떻게든 해 보려 했지만 잘 안 됐다. 살짝 급이 떨어지는 문학상에 응모하면 '당선 수락'을 하겠냐며 심사위원 식사값 등 돈을 내라고 한다. 권위 있는 문학상에는 지금까지 본심에 한 번 진출해 본 적이 없으니 진작 소설가의 꿈을 접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학우들이 '젊은 작가상' 등을 받는 것을 보며 물론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질투, 시기, 부러움, 뭐 그런 우중충한 생각들이었지만 바로 나는 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신춘문예건 문학상에 투고할 때 이상스러운 게 있다. 거의 다 투고자의 '나이'를 반드시 적도록 강조하는 곳이 많다. 젊은 재능을 발견한 것만이 빛나고 자랑스러운 일이고 그렇지 못한 재능은 보잘 것 없나? 젊은 재능만이 만개할 가치가 있고 살아온 세월을 글에 녹여내는 중장년의 작가 지망생은 한마디로 '섹시'하지 않아서? 그래서 떨어뜨리기 위함인가? 혹은 동점일 때 젊은이의 편을 들기 위해? 그렇게 연령을 반드시 명시해야 하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물론 젊은이의 글솜씨를 독려하는 상은 바람직하다. 한데 갓 데뷔한 젊은 작가들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면서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캄캄한 길을 걸어 나가는 작가들을 독려하는 그런 상이 있다면 어떨까? 아예 화끈하게 등단 최소 20주년 이상인 작가를 상대로,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이를테면 '익은 작가상'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다. 최고급 돋보기안경, 골밀도저하에 대항할 칼슘, 인체공학적 등받이 쿠션 등의 상품과 함께 소정의 상금을 수여하며 당신은 세상에서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면 작가들에게는 그보다 더 감격적인 응원이 없을 것이다.


김현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