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길, 토막 난 마을

입력
2022.07.16 04:30
17면

편집자주

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29·끝> 도시와 공장에 흡수되는 농촌을 찾아

지난 2회에 걸쳐서 물과 산에 대해 말씀드렸다. 농토를 만들기 위해 바다를 간척하고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댐을 만드는 바람에, 바다에서 어업을 영위하고 강을 오가며 삶을 꾸리던 사람들은 직업과 마을을 잃었다.

남한강 수운(水運)으로 번성하던 충청북도 충주의 목계나루는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로 시작하는 신경림의 시 '목계장터'로 유명한 포구였다. 하지만 남한강의 수운 기능이 정지된 오늘날에는 포구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배후의 마을이던 목계리도 쇠락 일로를 걷고 있다. 강원도의 중심 도시인 원주, 그곳의 한강가에서 고려시대부터 번성하던 흥원창도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는 흔적이 지워졌다.

한편 강 하류의 농토를 지키기 위해 일제강점기 시기부터 상류의 화전(火田)을 금지하는 정책이 실시되었다. 현대에는 화전민(火田民)들이 집단 주택에 수용되어 농업을 강제당했다. 이리하여 한국에서 산민(山民) 고유의 삶의 양식은 사실상 소멸했다. 강원도가 1976년 출판한 '화전정리사'에는 화전민들이 산을 황폐화시킨다는 설명과 함께, 집단 이주 주택에 수용된 화전민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산민에 대한 농민의 승리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현대 한국에서는 농업이, 강과 바다와 산에서 고유하게 이루어져온 여러 형태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 승리했다. 하지만 이렇게 천하무적 같은 농업도 도시화·공업화에는 저항하지 못한다. 이번 회에는 도시와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농촌이 사라져가는 이야기를 하려 한다.

도시에 상수도를 공급하기 위해 물속에 잠긴 마을

수몰민(水沒民)이라는 말이 있다. 하류 지역의 도시민들에게 상수도를 공급하고 공업·농업 용수를 확보해주는 댐을 만들기 위해 물속에 가라앉히는 마을에 살던 주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이 없던 곳에 물을 모으는 것이 댐이다보니, 댐을 만들면 반드시 수몰민이 발생한다.

1980년에 충청도 한가운데 대청호를 만들었을 때에도 3만 명 가까운 수몰민이 생겨났다. 대전의 한 지역신문에서 소개한 대청호 수몰민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마을이 사라진 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어디에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을 때마다 그는 "충남 대덕군 동면 내탑 42번지에서 왔어요"라며 수몰된 옛 마을의 주소를 말한다고 한다. 대덕군 동면 내탑리는 현재 대전 동구 내탑동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사실상 대부분 지역이 대청호 아래 가라앉아 있다. 일부 지역이 지적도상으로 '답'이나 '유' 같은 지목이 붙은 채, 마치 유령처럼 마지막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얼마 전 충청북도 옥천군 인포리를 답사했다. 장마가 시작되기 직전이어서, 대청호 수위가 상당히 낮아져 있었다. 그 덕분에 40년 전 수몰된 인포리 옛 마을의 삼거리와 다리가 몇 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가뭄이 들어 수몰된 마을이 모습을 드러내면, 예전에 그 마을에 살던 수몰민들은 고향을 찾는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 죽어 물이나 되어 천천히 돌아가리"로 시작하는 이동순의 시 '물의 노래'는 바로 이 대청호 수몰민의 심정을 읊은 것이다. 이 시에서 주인공은 "나는 수몰민, 뿌리째 뽑혀 던져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물속에 고향 마을이 있는 수몰민은, 죽어서 빗물이 되어서야 비로소 호수 아래 고향 마을로 돌아갈 수 있다.

수몰민은 토지 보상을 받았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태어나 자란 곳이 사라진다는 건 금전적 보상으로 치유될 수 없는 근본적인 상처를 사람들에게 입힌다. 민속학에서는 이들을 '제자리 실향민'이라고 부른다. 도시 사람들에게 상수도를 공급하고 공장을 돌릴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오늘도 한국의 농촌에서는 쉼없이 '제자리 실향민'이 탄생하고 있다.

길은 끊기고

경기도 평택시 동북부의 고덕동. 고덕국제신도시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신도시 지역이다. 평택시에서 공개한 행정지도를 보면, 고덕동은 신도시와 산업단지로 가득 차있고 그 서쪽을 고덕면이 감싸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덕동과 고덕면은 원래 고덕면이라는 단일한 행정구역이었으나, 고덕국제신도시를 개발하면서 신도시와 산업단지 지역을 고덕동으로 독립시킨 것이다.

이처럼 공식적인 행정지도만 보면, 고덕동에서는 2008년부터 시작된 신도시 건설이 2025년의 완공을 향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고덕동의 서북쪽, 고덕면의 두릉리·당현리와 경계를 접한 지역에 가 보면 현실은 다르다. 고덕신도시와 두릉리·당현리의 경계 지역에는 군사시설이 자리하고 있고, 이 군사시설은 당분간 다른 곳으로 옮겨갈 계획이 없다. 공식적인 행정지도에 그려진 구획은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이며, 이 계획이 언제 실현될 지는 아직 기약이 없다.

고덕동의 서북쪽 끝에서는 갈대밭 너머로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가 구름처럼 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옛 마을의 길이 끊겨진 채 버려져 있다. 옛길이 끊겨진 지점에는 고덕국제신도시의 외곽을 감싸는 새로운 도로가 놓여 있다. 끊겨진 옛길 너머로 고덕국제신도시의 아파트단지가 보인다. 이 지점에서 옛 평택군 고덕면은 끝나고 새 평택시 고덕동이 시작된다.

예전에는 고덕동과 동일한 행정구역이던 고덕면 당현리. 이곳에는 고덕신도시를 개발하기 위해 토지를 수용당한 옛 농촌 고덕면 주민들이 이주한 율곡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용산에서 평택으로 미8군 사령부가 옮겨오면서 토지를 수용당한 주민들이 이주한 두릉3리를 답사하러 갔다. 그곳에서는 저 멀리 율곡마을과 고덕신도시가 나란히 보였다. '평택군 고덕면'이라고 적힌 가옥조사표를 붙인 개량기와집은 폐가가 되어 있었다.

고덕신도시 부지에 편입된 옛 좌교리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모습으로 변하던지 '좌교리'라는 마을이 있었다는 것, 그곳에 누군가가 살았다는 것, 그 사실은 잊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지만 신도시에 입주한 외지 사람들은, 자기들에 앞서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대체로 관심이 없다.

마을은 토막 난다

옛 마을을 통째로 밀어내서 택지를 조성하고 신도시를 건설하는 방식을 택한 한국에서는, 전국 어디에서든 이렇게 주민들이 옮겨지고 길이 끊기고 마을이 지워지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강원도 원주시의 동쪽 끝에서는 2007년부터 '강원 혁신도시'가 조성되고 있다. 이 혁신도시의 한복판에 자리한 반곡역사관 건물 앞에는 '만남의 장'이라는 이름의 비석이 서 있다. 혁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수용된 마을들의 주민을 위로하기 위한 망향비다. 비석 뒤에는 버들만이 마을, 서리실 마을, 뒷골 마을, 뱅이두둑 마을, 배울 마을, 봉대 마을의 여섯 개 마을 이름이 적혀 있다. 이 비석만 보면 이 마을들은 혁신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소멸한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버들만이 마을은 옛 모습의 일부를 남기고 있다. 마을회관을 포함한 마을의 대부분을 혁신도시 부지로 수용당해서 토막 나기는 했지만, 마을회관과 한 쌍을 이루던 새마을창고와 옛길의 일부가 혁신도시 서쪽의 동부순환로 건너편에 남아있는 것이다.

원주 혁신도시와 그 주변 지역을 답사하던 중, 동부순환로와 군부대 뒤편에 폐허가 된 옛길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으로 검색해보니, 이 길에는 '유만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버들만이 마을 대부분이 혁신도시에 편입되다보니, 예전 마을로 이어지던 유만길의 대부분은 폐로(閉路)가 되었고, 새마을회관이 서있는 약 700m만이 현재도 도로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1950년대부터 이 마을의 변화를 목격한 심재선이라는 주민 분을 새마을회관 앞에서 만났다. 이 분은, 마을 대부분이 혁신도시에 편입되면서 주민들이 흩어졌기 때문에 이제 옛 마을 주민 가운데 생존한 남성은 자신뿐이라고 증언해주었다. 농촌 지역을 도시로 바꾸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은 흩어지고 마을은 토막 난다. 그리고 신도시에는 망향비가 세워져서, 토막 나기는 했지만 아직 옛 모습을 남기고 있는 마을을 이 세상에서 사라진 마을 취급한다. 그리고 또 다른 원주시 외곽의 농촌들이 신도시 편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1980년대의 한국을 생생히 기록한 뿌리깊은나무 출판사의 '한국의 발견' 시리즈. 그 가운데 경기도 시흥군편에는 이런 말이 실려있다. "근대화 또는 도시화라는 것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땅과 사람의 변화, 곧 그 쓰임새가 바뀐 땅에서 그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 오던 사람들의 생활이 어떻게 바뀌었느냐 하는 것이다."

'한국의 발견' 시리즈가 출판된 뒤로 한국에서는 수많은 답사기와 역사책이 출판되었다. 하지만 이들 책은 대부분 과거의 왕족과 양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불교와 성리학을 다룰 뿐이었다. 고향에서 뿌리 뽑혀 제자리 실향민이 되어 떠도는 시민들, 바다가 농촌이 되고 그 농촌이 다시 도시와 공장이 되는 근본적인 변화를 기록하려는 움직임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라도 기록하겠다는 뜻을 품고 전국을 걷고 있다. 한국의 변화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기록해서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한 나의 답사는 계속될 것이다.



글·사진=김시덕 문헌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