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당의 참의원 선거 대승에도 11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총리 취임 이후 그는 줄곧 '아베의 그늘'에 눌려 있었다. '기시다 내각의 중간평가격인 참선거 승리 → 가을에 내각과 자민당 인사 단행'으로 ‘기시다의 색’을 드러낼 계획이었지만,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망이라는 복병을 만났다.
이번 선거가 '아베를 애도하는 선거'가 되면서 축포를 쏘기 어려워졌고, 아베 전 총리라는 거물의 실종이 자민당과 내각을 어디로 몰고갈지 알 수 없는 혼미한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기시다 총리는 11일 도쿄 자민당 본부에서 선거 승리 기자회견을 열어 자축하기보단 위기를 강조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물가 상승, 코로나19 등을 언급하며 “지금의 일본은 전후 최대급의 난국”이라고 했다. 내각과 당 인사에 대해선 "당의 결속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해 당분간은 자기 정치를 하기보다 당 수습에 힘을 쏟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온건보수인 기시다 총리는 선거 이후 아베 전 총리와 차별화에 나설 것으로 예상됐다. 성장에 방점을 찍은 '아베노믹스'와 대비되는, 분배를 강조한 '새로운 자본주의'(기시다 총리의 경제 기조)에 속도를 내려 했다는 관측이 많다.
그러나 아베 전 총리의 부재가 기시다 총리의 발목을 잡는 역설적 상황이 됐다. 마이니치 신문은 "아베 전 총리가 없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기시다 색’을 내세우면 맹렬한 당내 반발을 초래하고 당내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전엔 기시다 총리가 상대할 대상이 아베 전 총리 한 명이었지만, 이제는 "아베의 노선을 수정하지 말라"는 당내 강경파들과 일일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2025년 7월 참의원 선거 때까진 일본엔 대형 선거가 없다. 야당 등의 견제에서 자유로운 앞으로의 3년은 '기시다 황금의 3년'이라고 불린다.
기시다 총리가 마냥 기다리진 않을 것이다. 9월쯤으로 예상되는 당과 내각 인사가 분수령이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해 취임 직후 자신의 자민당 총재 당선을 지원한 아베파 등 각 파벌을 배려하는 인사를 했다. 이번엔 아베파를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하는 인사를 단행할지 여부에 관심이 모인다. '새로운 자본주의' 등 '기시다표'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시점도 인사 이후가 될 전망이다.
강경파와 충돌이 예상되는 정책은 방위력 강화와 방위비 증대다. 아베 전 총리는 “적자 국채를 발행해 5년 내 국내총생산(GDP)의 2%까지 방위비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기시다 총리는 2%라는 숫자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11일 기자회견에서 방위력 강화에 대해 “방위력 강화는 예산과 재원까지 3종 세트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아베 전 총리의 입장과 각을 세웠다.
한국, 중국 등과의 정상외교를 통한 관계 개선 역시 참의원 선거 이후로 미뤄 둔 과제다. 아베 전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사수정주의 정책 등으로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켰지만, 기시다 총리는 좀 더 유연한 외교를 펼칠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제동을 걸 아베 전 총리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확인된 보수 민심을 고려하면, 적어도 한일 관계에 있어서는 빠르게 정책 전환을 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는 “기시다 내각은 한국에서 진행되는 강제동원 민관 협의체 논의 진행상황을 일단 지켜보면서 판단할 것”이라며 “윤석열 대통령이 한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지만, 그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 점도 변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