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당 대표는 차기 대권주자로 가는 디딤돌일까, 독이 든 성배(聖杯)일까. 독자적 정파를 이끄는 당대표일 경우 최고권력자와 긴장관계가 된다. 서로 주고받을 게 명확하다면 공존이 가능하다. 반면 정치적 자산을 물려받은 2인자일 때는 벼랑 끝을 절묘하게 걷는 생존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 정권에 대한 야당의 공세를 대신 막아내고, 내부에선 대통령 측근이나 당내 경쟁그룹의 견제와 질투를 견뎌야 한다.
‘당권형’ 대표와 ‘관리형’은 비교적 모험을 걸지 않고 상대적으로 안전운항에 편리하다. 문재인 정권에서 이해찬 대표는 대권에 관심이 없더라도 당내 주주라는 입지를 배경으로 탄탄한 지위를 유지했다. 황우여 전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대표는 원만한 리더십에 2012년 대선을 승리로 이끌며 순항했다. 본인의 정치색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으면 저항을 덜 받지만 대중 정치인으로 도약하기엔 한계가 있다. 여의도에서 합리적 리더십으로 정평이 난 강재섭 전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대표의 경우다. 격렬한 대결이 일상인 정치권에선 ‘강한 리더십’이 선호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에 밀착한다고 정치적 독립에 유리한 것은 아니다. 추미애 전 민주당 대표는 2017년 대선에서 문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헌정사상 첫 여성 집권당 대표가 됐다. 추 전 대표는 이후 법무부 장관에 발탁된 뒤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과 정면충돌하며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나 다름없는 길을 택했다. 친문 진영에 올라탄 이낙연 전 대표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자제하다 보니 유일한 승부수였던 ‘이명박-박근혜 사면론’마저 패착으로 돌아왔다.
‘비주류 여당 대표’는 민주당 송영길 전 대표가 해당된다. 뚝심이 만만치 않지만 지도부 내 친문 주류에 포위되다 보니 존재감을 위해 무리수를 두기 십상이다. 대선 패배 후 1년도 못 채우고 사퇴했고 서울시장 출마라는 최악의 선택으로 이어졌다.
지금 정치생명이 절벽 끝에 몰린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비주류에 나이까지 어린 특이한 여당 대표다. 36세에 대표가 된 이준석은 배낭 메고 지하철을 이용하며 서울시 공영자전거를 타고 국회 당대표실에 출근했다. 전통과 권위를 깨는 파격, 말싸움에 능한 튀는 행보는 1년 만에 추락했다. 현역 당대표가 당 윤리위에 회부돼 징계를 받은 건 초유의 일이다. 그는 7일 밤 ‘성상납 증거인멸 의혹’ 관련 윤리위 회의장에 들어가며 대선과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고도 축하는커녕 당내 공격과 무시에 시달려야 했다고 울분을 쏟아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어긋난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나 유승민 전 원내대표처럼 이준석의 몰락도 윤석열 대통령의 의중과 무관치 않다는 게 정설이다. 대통령의 ‘여의도 출장소’로 전락하는 정권 초 여당의 생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당 지도부의 한 의원은 “대선 때 가출하고, 후보 괴롭히고, 감정 절제 못하고, 당 내부에 돌 던지고 난장 치는 무례한 당대표가 어디에 있냐”고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보수층 내 광범위한 괘씸죄에 걸린 것이다. 다 죽어가던 보수를 살려낸 이준석. 그가 퇴출된 국민의힘은 과거의 낡고 구태의연한 색깔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는 촌평도 적지 않다. 안 그래도 윤 정부 출범 두 달 만에 ‘검찰공화국’, 경찰장악, 친기업, 규제완화, 친미반중 외교 등 많은 가치가 과거로 회귀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참이다.
이준석 퇴진의 후폭풍은 2030 당원층의 반응, 향후 2, 3주간 여론의 향배가 일차적 분수령이 될 것이다. 또 다른 관건은 그가 띄운 당 혁신위가 내놓을 성과물이다. 이 대표가 없어 힘을 잃겠지만, ‘동일 지역구 국회의원 3선 초과 연임 금지’ 같은 기득권 내려놓기 쇄신안을 당내 다수가 깔아뭉개는 모습으로 비칠 경우, 이준석은 사라져도 그의 정치적 자산으로 남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