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만 남아있어도 잎이 새로 나니 경이롭죠. 이 생명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함께 하고 싶다는 바람이 저를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에세이 작가 심경선(36)씨는 20대 후반부터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앓았다. 하루 20시간 가까이 자는 과다 수면에 자살 충동까지 느꼈다. 그런 심 작가를 지탱해준 친구가 관엽식물 싱고니움과 칼라디아다. 식물에 물을 주기 위해 침대에서 억지로 일어나고, 겨울엔 온풍기를 쐬어 주면서 자신의 흐트러진 마음도 일으켰다.
200여 개의 식물을 키우며 ‘집에 식물이 있는 건지, 식물원에 사람이 얹혀 사는 건지’ 모를 지경이 됐다는 심씨는 원예 노하우를 담은 책 ‘죽고 싶은 내 두 손에 식물이’를 펴냈다. 심씨는 "자살을 생각하는 동시에 화분 분갈이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겪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식물의 생명력과 역동성에서 많은 위로를 느꼈다”고 말했다.
무심한 줄 알았더니 어느새 꽃망울을 터트리고, 느긋한 듯 싶더니 불쑥 눈높이까지 자란다. 식물이 주는 반전 매력에 빠져 잎을 닦고 줄기를 다듬는 수고를 자처하는 이들이 있으니, 스스로 ‘식집사’(식물을 모시는 집사)라 칭한다. 방탄소년단(BTS), 가수 엄정화 등이 반려 식물을 자랑할 만큼 반려 식물 키우기는 모든 세대를 관통하는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전문가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기와 맞물려 반려 식물 문화가 전성기를 맞았다고 분석했다. 본보가 만난 5명의 식집사들은 화분 개수만큼 많은 '식연'(식물과의 인연)을 풀어놨다. '풀멍'을 때리며 위로받는 동시에 창업과 유튜브 활동, 재테크까지 나선 일석이조 사례도 적지 않았다.
“미용실을 하는데 코로나19로 영업이 어려워져 식테크(식물 재테크)를 했어요. 희귀 식물인 몬스테라 알보를 거래해 800만 원 가까이 수입을 올리기도 했죠. 코로나19 시기 저를 살게 해준 게 식물이에요. 지금은 그 고마움을 나누고 싶어 손님들에게 화분을 나눠주죠. 동네에서 소문난 식물 전도사입니다.”(미용사 홍한ㆍ35)
“일과 교육으로 아이와 떨어져 살게 되면서 공허함을 느꼈어요. 육아 금단 현상이 생겨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66개에 이르네요. 제가 손길을 주면 그 안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생명이 연장되는 신비함, 거기서 오는 만족감과 충족감이 크죠.”(롯데콘서트홀 근무 이미란ㆍ44)
“식물에 빠져 6년간 다니던 회사를 퇴사했어요. 천천히 자라 행복을 선사하는 식물의 기쁨을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플랜트숍 '서서히'를 열었어요. 식물은 제가 이렇게 커, 저렇게 해라고 한다고 되지 않아요. 순한 줄 알았는데 까다롭고, 까다로운 줄 알았는데 순한 식물을 보며 사람도 다 다르단 진리를 깨닫죠."(플랜트숍 운영 한진아ㆍ30대)
식물에 위로 받는 이들이 느는 건, 현실을 살아가기가 그만큼 팍팍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취업은 어렵고, 부동산ㆍ주식 재테크 열풍에 뒤쳐져선 안 된다는 위기감에 허덕인다. 성취가 부족하면 ‘자기 계발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니 도무지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렵다. 물과 햇빛 외에는 아무 욕심도 없으면서, 자기만의 시간표를 지키며 꿋꿋이 살아가는 식물이 경탄스러운 이유다.
서지현 삼육대 환경디자인원예학과 조교수는 “바이오필리아라는 용어가 있는데 인간이 느끼는 태초의 녹색 갈증이라는 뜻”이라며 “사람이 식물을 가까이 하는 것은 본능으로, 스트레스 감소와 정서 안정에 효과가 있다는 게 여러 연구에서 증명됐다"고 말했다.
식집사들이 늘며 갖가지 유행어도 열매를 맺고 있다. 식물을 잘 키우면 ‘그린 핑거’, 잘 죽이면 ‘살식마’다. 나와 잘 맞는 식물은 ‘식연이 있다’고 하고, 식물을 통해 알게 된 친구는 ‘식친’이다. 풀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 ‘풀멍’, 고물가에 직접 야채를 키워 먹는 ‘파테크’(파 재테크) ‘상추테크’(상추 재테크) 용어까지 탄생했다.
식물 관련 출판 시장도 쑥쑥 자랐다. 7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출간된 식물 관련 책은 모두 107종으로 2020년 89종보다 18종 늘었고 판매량은 30% 증가했다. 올해도 7월 현재까지 64종의 식물 책이 나왔고 판매량은 18% 뛰었다. 주된 독자는 40대 31%, 30대 27%, 20대 12%로 3040세대의 관심이 특히 컸다.
MZ세대의 놀이터인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은 초록 천지다. 30대 직장인으로 유튜브에서 홈가드닝 채널 ‘와일드엣홈’을 운영하는 박선화씨 부부는 이름난 ‘부부 식집사’다. 방송인 이해솔(33)씨도 식물 정보를 주고 받기 위해 유튜브에 홈 가드닝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조회수가 74만 회에 달한다.
식집사가 되는 데 자격이란 게 있을 리 없다. 그저 자연의 일부인 식물이 현대인의 생활 공간으로 들어 오면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시작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애정으로 식물을 돌보면 준비 완료다. 식집사들도 "그린 핑거가 되기 위해 수많은 식물을 땅에 묻었다"고 실토했다. 죄책감은 조금만 갖자는 얘기다.
그래도 걱정이 많은 초보 식집사를 향한 전문가 조언. “초보 식집사라면 성장이 빠르고 환경 변화에 둔한 식물로 시작해 성취와 재미를 느끼는 게 좋죠. 선인장과 다육이는 성장이 육안으로 도드라지지 않기 때문에 물을 많이 줘 죽는 경우도 많아 초보자에겐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한진아) “식물의 이름(학명)에는 기본적인 식물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식물을 사기 전에 이름을 확인하고 특성을 알고 재배하면 절반은 성공이죠.”(서지현).